미사의 노래-박경원 작사 이인권 작곡 임영일곡
一 당신이 주신 선물 가슴에 안고서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어둠을 걸어가오 저 멀리 니코라이 종소리 처량한데 부엉새 울지 마라 가슴 아프다.
二 두 손목 마주잡고 헤어지던 앞뜰엔 오늘도 피었고 나 향기 높은 다리아 찬 서리 모진 바람 꽃잎에 불지 마라 영광의 오실 길에 뿌려보련다.
三 가슴에 꽂아주던 카네이션 꽃잎도 지금은 시들어도 추억만은 새로워 당신의 십자가를 가슴에 껴안고서 오늘도 불러보는 미사의 노래
安東 儒學者 李中彦의 殉國 日誌. 대동(大東)이 큰 액운을 맞았는가? 금수가 사람을 핍박하니 산하가 옛날과 다르도다. 단연코 다른 방도가 없구나. 한 치의 마음을 바꾸기 어렵도다. 의리를 취하고 삶을 버림은 옛 성현의 가르침이다. 뛰어나도다! 향산 어른이시여! 조용히 순국하셨도다! 나 또한 어르신의 뒤를 따르리로다. 돌아가 여러 성현들을 뵙고 싶다. 천운이 돌아올 날, 오호라! 어느 때일런가! 우리 동포들이여! 오직 힘쓰고 또 힘쓸지어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안동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이중언(李中彦)은 만 60세의 나이에 단식 순국하였다. 순국 후 공개된 이 '경고문'은 단식 둘째날인 10월 11일에 썼다가 책갈피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퇴계 후손인 이중언은 바로 순국할 뜻이었는데, 옆집에 사는 아저씨 향산 이만도가 먼저 입산하여 단식에 들어가자 잠시 미뤘다. 한꺼번에 단식을 하게 되면 집안을 번거롭게 만들 것을 우려하여 향산의 순국 소식을 들은 후부터 단식을 결행한 것이다. 그의 순국 과정은 어느 제자가 '고종일록(考終日錄)'(이 기록이 담긴 동은실기)이란 일지로 정리했다.
▲ '고종일록(考終日錄)'〉(순국과정의 기록이 담긴 동은실기). 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나라가 이렇게 된 상황에서 사는 것이 치욕'이라고 하면서 '나라를 위한 의리를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0월 10일 이만도의 부음을 듣고 아버지와 선조의 사당을 참배하고 부모의 묘소에 절을 올린 후 단식을 시작했다. 부인과 아들도 따르겠다고 하자, '죽은 사람을 보내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당신의 책임'이라고 부인을 말렸으며, 아들에게는 '형제도 없고 어머니가 살아 계시니' 살아남을 것을 지시하였다.
단식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친지와 제자들이 찾아왔는데, 모두 예로써 대하였다. 어떤 이들은 '향산처럼 황제의 은총이 깊은 것도 아니니 순국할 이유가 없다'거나 '가문의 수장으로서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거나 '제자들의 믿고 의지하는 바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단식 중지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공의 거사' 가 '동방의 맥이 의지하는 바'라든가 '높고도 뛰어난 일'이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런 말에는 '부질없는 소리'라며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았다. '죽음으로 의리를 지키니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한 이에게는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삶의 의리를 말하였다.
11월 5일 순사가 와서 단식을 중지시키려고 했는데, '그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내가 그들을 칼로 베겠다'고 하며 물리쳤다. '이날 저녁 시자(侍者)에게 두건과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바로 눕혀주도록 지시했다. 그러고는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단식한 지 27일 만이었다. 이중언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리의 시작이다'고 했다. '국치'를 당하자 70여명의 지사들이 자정(自靖•자결) 순국했다. 선비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감에 자정을 택한 이중언은 자녀와 동포들에게는 '힘쓰고 또 힘쓰라'고 했다. 자신과 같은 부끄러운 세대가 되지 말라는 뜻이리라.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