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선-박경원 작사 손로원 작곡 이재호
一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향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든 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든 가 태극깃발을 갈매기야 울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二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든 가 타국 살이에 몇 번을 불렀든 가 고향노래를 칠성 별아 빛나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놀이에 새날이 크다
普成과 崇實의 大學敎育運動 1908년 발포된 사립학교령에 의해 사립학교 단속이 시작되자, 항간에 사립학교 폐지설이 유포되어 자못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9일자에 다음의 기사가 실렸다.
"보성()전문학교 교주 이종호(李鍾浩)〈사진〉씨가 기금 10만원을 적립하고 현금 그 학교를 확장하는데 명칭은 보성대학이라고 하고 그 안에 법과, 경제과, 상과, 정과(政科)를 나누어 설치하고 또 중학부, 소학부, 도서부, 출판부를 둔다더라."
황성신문 3월 10일자에는 "지금 또한 상과 전문을 증설하여 점차 대학교를 성립하기를 협의 중이라더라"라는 기사가 나오고, 3월 13일자에는 "전문학교를 대학교로, 중학교를 중학부로, 소학교를 소학부로 일체 개칭한다는데 인가를 얻을 차로 학부(學部)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더라"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것이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대학 설립 운동이었으나, 일제의 허가를 얻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고급 인력을 원하지 않았고 소수의 일본 고급 인력을 본국에서 데려와 활용하는 정책을 택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3일 법률학 전문과(1907년 경제학과로 변경하고 교육과정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와 이재학(理財學) 전문과를 두고 개교하였다. 보성전문의 설립자는 내장원경 등을 역임한 이용익(李容翊)이었다. 1907년 이용익이 사망하자, 19세의 손자 이종호가 보전의 경영을 맡게 되었다. 이종호는 헤이그 밀사사건에 깊이 관여하고, 안창호가 비밀결사로 조직한 신민회에 간부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에 일제가 민족 지사를 체포하는 가운데, 이종호는 급진적인 항일인사로 지목되어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 이종호는 보성학교 외에도 수개 학교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05년은 한국 교육사에 뜻깊은 해였다. 보성전문뿐만 아니라 이용복•윤덕영이 설립한 한성법학교, 엄주익이 설립한 양정의숙, 김진구가 설립한 법률•인문 양과의 중경의숙, 정치과로 설립된 돈명의숙 등이 전문학교 수준의 교육을 개시했다.
국내 최초의 4년제 대학 설립은 외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1897년 미국 선교사인 배위량(裵緯良, W. M. Baird)〈사진〉이 평양에 설립한 숭실학교는 1906년 4년 교육과정의 문과 대학부를 두었다. 이 대학부에 입학한 학생은 1904년 5년제 중학(지금의 중•고통합과정)을 졸업하고 학업을 계속한 변린서(邊麟瑞)와 김두화(金斗化)로, 1908년 첫 졸업생이 된다. 공립신보(共立新報) 1908년 11월 18일자는 "평양 예수교 장로교회에서 동학교(숭실)를 창립하고 학생모집함을 듣고 재삼 칭찬하더니, 그 사이에 점점 확장하여 또 대학교를 창설하고 그들 학교에서 졸업한 학생을 교수한고로 금년 학위시험에 변린서 김두화 양씨가 졸업장을 밧고 그 졸업예식 할 때의 사진 1폭이 본사에 래도하얏스니 대학교라 하는 말이 삼천리 강산안에 처음듯난 말이 아니며 본국 대학교의 졸업생이라 하는 말이 2천만 동포가 온대 처음이 아닌가"라고 1면에 보도했다. 두 사람은 졸업 후 105인 사건과 3•1 운동 등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