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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해진 부산항-남임수///고종도 신뢰한 시전(市廛) 상인

bsk5865 2014. 9. 24. 08:29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9.24 05:50

 

울며 해진 부산항-남임수///고종도 신뢰한 시전(市廛) 상인(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813 


울며 해진 부산항-남임수


울며 해진 부산항-남임수

작사 강사랑 작곡 박시춘


울며 해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는)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음~~


달빛 아래 허허 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 곳 없는 수평 천리길
이별만은 무정 트라 이별만은 야속더라
더구나 못 잊을 사람끼리 사람끼리


고종도 신뢰한 시전(市廛) 상인

1910년 발행된 '조선산업지'는 "갑오개혁 때에 전매권을 폐지하여 일반 상인의 자유 판매를 허용하였으므로 육의전은 일시에 곤란에 빠졌지만, 지금은 크게 분발하고 경쟁의 마당에 서서 서울 상점의 중심인 면목을 유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시전은 태종이 1411~1414년간 중앙정부와 서울 주민의 수요를 위해 종로를 중심으로 하는 구역에 2027칸의 행랑을 짓고 상인을 입주시킨 것이 시발이었다. 시전은 18세기말 120개로 늘어났다. 그중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는 선전(線廛), 무명과 은자(銀子)를 취급하는 면포전(綿布廛), 국내산 비단을 취급하는 면주전(綿紬廛),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紙廛)〈큰 사진〉, 모시와 삼베를 취급하는 저포전(苧布廛)〈작은 사진〉(저포전 깃발)과 포전, 어물을 취급하는 내외어물전(魚物廛)은 규모가 가장 크고 국역 부담도 무거웠다. 이들을 육의(六矣)전이라 하였다.

조선후기 시전은 궁궐•관청의 수리 등 잡역이 있을 때마다 노동력과 물력을 제공하는 국역을 부담하였으며, 그 대신에 난전(亂廛)금지권의 혜택을 받아 시안(市案)에 등록된 물종을 독점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 1791년 물가 안정과 상업 자유의 확대를 위해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난전금지권이 폐지되고 일반 상인과 더불어 자유롭게 매매하는 통공발매(通共發賣)가 이루어졌다.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河合)문고에 소장된 면주전 문서에 의하면, 소속 상인은 총 68방의 소점포에서 영업하였다. 면주전의 정규 구성원은 80명이지만, 반깃(半衿•2분의 1 자격)으로 가입한 사람도 있어서 1832년에는 무려 193명이었고, 1870년대부터 1913년 해산 때까지는 120명 전후였다. 이렇게 동일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같은 점포 건물에 출점해서 번호를 매긴 소구획에 각각의 가게를 내고 있는 모습은 오늘날 남대문•동대문시장과 비슷하다. 면주전 전체를 통괄하는 조직 대방(大房)에는 대행수(大行首) 1명과 도영위(都領位)ㆍ부영위ㆍ삼(三)령위가 각 1명, 상공원(上公員)ㆍ하공원이 각각 1명씩 있었다. 면주전의 업무는 관청이나 왕실에 대한 면주 납품, 국역으로서 노무 제공, 그 구성원을 위한 상호부조기능 등이었다.

1882년 조청(朝淸)조약으로 중국•일본상인이 자유로이 영업함에 따라 시전상인은 타격을 받았다. 이에 항의하여 시전은 1887년, 1890년, 1898년 세 차례 철시(撤市)투쟁을 벌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육의전의 난전 금지권이 폐지되었다. 1905년 화폐정리사업에 따른 금융 경색으로 부유한 시전상인도 유동자금을 구하지 못하여 동산과 부동산을 헐값에 팔거나 전당을 잡혔다. 시전은 이러한 삼중고를 견디어내면서 1910년경에도 서울 소매상업의 중심을 이루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시전상인 배동익(裵東益)은 돈줄이 매우 확실하여, 조정에서 인사발령을 할 때 관직을 사는 사람이 어음을 가져오면, 고종은 "이 어음이 배동익에게서 나왔는가?"라고 물었다 한다. 가업인 선전을 계승한 백윤수(白潤洙)는 개항기의 난관을 극복하고 1916년 자본금 50만원의 대창(大昌)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근대적 기업인으로 전환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태창(泰昌)직물회사로 두각을 나타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