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작사 박영호 작곡 김송규
一 쌍 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 젖은 손수건 진정코 당신만을 진정코 당신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눈물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二 파도는 출렁출렁 연락선은 떠난다 정든 님 껴안고 목을 놓아 웁니다 오로지 그대만을 오로지 그대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한숨을 삼키면서 떠나갑니다 울지를 말아요.
三 바람은 살랑살랑 연락선은 떠난다 뱃머리 부딪는 안타까운 조각달 언제나 임자만을 언제나 임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끝 없이 지향 없이 떠나갑니다 잊지를 말아요
1年8個月 만에 解體된 大韓興學會 1910년 6월 28일 황성신문 광고란에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 명의로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렸다. '일본 경시청(警視廳)에서 시사(時事) 게재(揭載)에 대한 제재로 보증금 천원을 납(納)하기까지 발행 정지를 명하는 고로 부득이하여 정간(停刊)한다'는 내용이다. 대한흥학회의 학회지인 '대한흥학보'를 일본 경찰이 발간 정지시킨 일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광고다.
대한흥학회는 1909년 1월 일본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이 조직한 친목단체다. 초대 회장은 채기두, 부회장은 최린〈큰 사진〉(왼쪽에서 세 번째, 1921년경 모습)이 맡았다. 이들은 학회 내에 출판부를 두고 인쇄기를 구입하여 1909년 3월부터 학회지 '대한흥학보'〈작은 사진〉를 매월 2000부씩 발행해 국내외에 배포했다. 이 학회지를 통해 회원들의 정치•사회•교육•문화 영역의 다양한 학술활동을 지원했다. 대한흥학회는 또 창립 직후부터 국내의 애국계몽단체들과 서로 연계해 새로운 학문의 소개와 학술 연구는 물론, 사회계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1909년 여름휴가 중에는 서울에 강습소를 세우고 계몽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새 학문에 대한 기대 속에서 그 지원자가 780명(황성신문, 6.15.)이나 된 적도 있었다.
1909년 12월 4일 일진회에서 한일합방성명서를 발표하자, 일본 동경에서 대한흥학회 회원 700여명이 단식농성을 하면서 이에 대한 반박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일진회의 망동을 규탄하는 국민대연설회에 고원훈•이풍재씨를 대표로 정하여 서울로 파견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학부(學府)에서는 이들 학생 대표를 불러 '학생 자격으로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말도록 효유'(대한매일신보, 12.18.)하기도 하였다.
일본 동경의 경시청에서는 대한흥학회의 국내 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엄밀 단속'을 시작했다. 1910년 2월 국민동지찬성회(國民同志贊成會)가 중심이 되어 한일합방 청원서를 또 제출하자, 대한흥학회는 특별평의회를 열고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친일적 망동을 성토할 문건을 기초하여 각 지방에 살포하려고 준비했다. 그런데 일본 경찰에서 그 기미를 탐지하고 우편국에 명하여 대한흥학회에서 보내는 모든 서류를 경찰서에 신고한 후에 발송하도록 조치했고, 순사 30여명이 대한흥학회 회관을 수색해 관련서류를 모두 압수하고 학생 대표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1910년 5월 대한흥학보 13호를 '치안방해죄로 압수'(황성신문, 6.7.)하고 그 발간을 정지시킨 후에 보증금 일천원을 납부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 같은 탄압이 널리 알려지자 재미동포 신문 신한민보는 '대한흥학회에 대한 권연문(勸捐文)'(신한민보, 7.15.)을 발표하고 대한흥학보의 속간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대한흥학회는 더 이상 학회지를 발간하지 못한 채 강제로 해체되고 말았다. 학회에 관여한 학생들은 일본 경찰과 헌병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일제 강점 직후 한성신문으로 신문의 제호를 바꾼 황성신문은 9월 2일 '학회 해산'이라는 기사를 통해 '동경 유학생이 조직한 대한흥학회가 사실상 해산을 선고하고 지난 8월 29일에 문패를 철거하였다'고 보도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