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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在日 유학생과 일본의 두 얼굴

bsk5865 2014. 9. 25. 08:5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9.25 05:49

 

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在日 유학생과 일본의 두 얼굴(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819 


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


울며 헤진 부산항-황금심.백설희

작사 추미림 작곡 박시춘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며
연락선 난간머리 으스름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사람끼리


등대아래 끼륵끼륵 물새만 날고
부산항 아가씨야 날 보내다오
이별만은 외롭더라 이별만은 바보더라
더구나 외로운 사람끼리 사람끼리


在日 유학생과 일본의 두 얼굴

"일본인 남자는 간첩의 기질을 갖추었으며, 여자는 창기(娼妓)의 기질을 갖추었나니, 일본인은 차등 기질로써 지상(至上)한 이상적 국가에 헌상함으로 국운을 융대케 하는 국민적 도덕을 작(作)하였도다. 일본인은 모방적 인물이다."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이 만든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 13호(1910. 5. 20.)에 실린 글이다. '남자는 간첩, 여자는 창기'란 제목의 이 기사는 프랑스 신문에 보도된 글을 번역한 것이지만, '간첩'이나 '창기'와 같다는 비난도 꺼리지 않고 근대 문명 배우기에 열성적인 일본인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대한흥학보<사진>(1909년 5월 20일 발행된 제 3호)의 편집인은 '일본 교육계 사상의 특점'이라는 글도 게재하여 일본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은 동양의 선진국이라. 일본은 세계의 일국이라. 일본의 40년래 문명의 보무는 곧 일본의 40년간 교육의 효과"라고 했다(대한흥학보 13호, 1910. 5. 20.).

대한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현해탄을 건넜는데, 이는 일본에서 문명화된 조국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대개 일본은 동양의 선진국이니 그 문명 학술은 동양의 고유한 질소(質素)를 좋은 수단으로 개량하고 구미의 참신한 물질적으로 윤색을 가하였은즉, 가장 우리 한인이 일본의 학문을 연구하기 지리상 풍속상에 모두 편의한 점이 다(多)하고…."(대한흥학보 7호, 1909. 11. 20.)

한국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침략자의 실체도 확인하게 된다. 1905년 국권 침탈에서 1910년 강제 병탄으로 이어지자, 유학생들에게 일본은 배워야 할 문명국인 동시에 극복해야 할 제국주의 침략자로 다가왔다. 1910년 8월 유학생들은 대한흥학회 총회에서 '합방' 반대 운동 방법을 논의하고자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유학생회 간부들은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거나 미행을 당하는 등 행동의 구속을 받았다.

강제합병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 공부하던 학생들은 일본을 배우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명치(明治)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조소앙(趙素昻:1887~ 1958)〈사진〉(유학시절 모습. 맨 오른쪽)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종교와 철학 관련 독서를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그는 세계 전쟁이 종식되면 민족의 독립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유학 시절 일기인 '동유략초(東遊略抄)'에서 그는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오늘 같은 수치는 처음 느꼈다. 2천만 국민이 일시에 노예가 되지 않았는가"라며 비통해하면서도, 일본의 앞선 문물에 대해서는 경탄했다. "(일본에는) 동네가 있으면 반드시 학교가 있고, 가난한 농촌에도 전기 통신시설이 있으며, 산길에도 차도가 있고, 어디를 가나 공장이 있다."(동유략초, 1906년 7월 19일) 그러나 1911년 전쟁 반대를 역설하는 평화연설회에 참여한 뒤 이에 냉소적인 일본을 비판하는가 하면, 야스쿠니 신사 제사 때마다 내리는 비에 대해 '전몰자의 원혼이 청산을 곡하는 것'이라는 시를 읊었다(동유략초, 1911년 5월 7일, 11월 10일). 그에게 군국주의 침략자 일본은 극복의 대상이 된 것이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