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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백마강-박경원///企業 家門 斗山 創設者 朴承稷

bsk5865 2014. 9. 27. 08:43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09.27 05:38

 

꿈꾸는 백마강-박경원///企業 家門 斗山 創設者 朴承稷(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5832 


꿈꾸는 백마강-박경원


꿈꾸는 백마강-박경원

작사 조명식 작곡 조명암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찟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구나


企業 家門 斗山 創設者 朴承稷

조선시대에 상인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해 기업으로 성장한 가문이 드물었는데, 기업 가문으로 성공한 대표 사례가 박승직〈오른쪽 사진•만년의 박승직〉과 그 후손의 기업이다. ‘조선 은행•회사•조합요록’에 의하면, “1905년경 니시하라 류조(西原龍三)가 박승직, 최인성, 김원식, 최경서와 함께 일본으로부터 면사(綿絲)•포(布)를 직접 수입, 매매하기 위하여 조합을 만들었다. 조합원 30~40명이 자본금 2만900원을 출자해 합명회사 공익사(共益社)를 설립했다.” 일본인 니시하라는 공익사의 전무, 박승직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박승직은 1864년 경기도 광주군 소작농의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서당에서 10여년간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881년 지주 민영완(閔泳完)이 전라도 해남군수로 부임하면서 평소 인물됨을 보아온 박승직을 데리고 갔다. 1936년 1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박승직은 “1882년에 처음 면포업을 시작해 전라도 영암, 무안, 강진 등지로 주로 무명을 사러 다녔다.…그렇게 헐한 무명을 한 번 무역에 30필가량 해다가 그것을 서울에 가져다 팔기를 십여년 했다. 그 후 육의전제도가 폐지되고 모든 장사가 자유롭게 되던 해에 공익사를 설립했다.”

박승직의 자서전인 ‘심야중자필(深夜中自筆)’(1920)에 의하면, 행상업을 해 번 돈 300냥을 맏형 박승완에게 보내 포목상을 했다. 박승직의 ‘종로 4정목 점포의 역사일기’(1936년경)를 보면 1896년 6월에 포목점을 열었다. 포목점이 있던 종로 4가는 조선시대 지명으로는 이현(梨峴•배오개)이었다. 18세기에 이현은 칠패, 종루와 더불어 ‘도성 3대시(都城三大市)’라 불렸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