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라 삼팔선-남인수 작사 이부풍 작곡 박시춘
一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련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리 길 꿈 마다 너를 찾어 ~ 삼팔선을 탄한다
二 아~ 꽃필 때나 오시려느냐 아~ 눈올 때나 오시려느냐 보따리 등에 메고 넘든 고갯길 산새도 나와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 이 목숨을 바친다
三 아~ 어느 때나 터지려느냐 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나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던가 손모아 비나이다 ~ 삼팔선아 가거라
朱蒙
생애와 업적 다른 이름; 동명성왕(東明聖王)/추모(鄒牟)/상해(象解)/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
고조선이 무너지고 동북아시아 여러 사회에 수준 높은 문화와 문물이 전파되자,이를 받아들인 세력들이 곳곳에서 나타나‘하늘의 자손’ 이라 자처하며 새로운 영웅을 꿈꾸었다. 그 시대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사람이 주몽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이야기는 〈광개토대왕 릉 비문>.《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동명왕편》 등에 실려 있다.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여 왕 해푸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이을 아들을 구했다. 어느 날 곤연(鯤淵)이라는 큰 연못에 이르는데 그가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지 금색을 띤 개구리 모양의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다. 왕은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아이라며 기뻐했다. 아이를 데려가 금와라 이름 짓고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그 뒤에 아란불이라는 재상이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하며 말했다.“일전에 하느님이 내려와‘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토양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왕은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 뒤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나라를 세웠다.
해부루가 죽고 왕위를 계승한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 사냥하러 갔다가 한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저는 하백의 딸로 유화라고 합니다. 동생들과 함께 놀다가 한 남자를 만났는데,그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였습니다. 그가 저를 유혹하여 사욕을 채운 다음 돌아오지 않자 이 사실을 안 부모님이 저를 이곳으로 귀양 보냈습니다”라며 자신의 처지를 말했다.
금와왕은 이상하게 여겨 이 여자를 방안에 가두어두었다. 방안에 햇빛이 비쳐 유화가 몸을 피했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왔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유회가 임신을 했는데, 얼마 뒤 크기가 닷 되쯤 되는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알을 개•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그래서 길바닥에 버렸더니 소와 말도 그 알을 밟지 않고 피해 다녔다. 또한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날개로 덮어주었다. 깨뜨려버리려고도 했으나 깨지지 않아 결국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골격과 외모가 빼어났고 남달리 뛰어 나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아이를 주몽이라 불러,주몽이 바로 이름이 되었다.
그 기예(技藝)와 능력이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을 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맡겼다. 주몽은 날랜 말은 먹이를 적게 주어 마르게 하고,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말은 자신이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어느 날 들판에서 사양을 하는데,주몽은 남들보다 화살을 적게 받았는데도 월등히 많은 짐승을 잡았다. 그러자 왕자들과 신하들이 다시 그를 죽이려 음모를 꾸몄다. 이를 눈치 챈 주몽의 어머니가 말했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일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에 간들 큰일을 못 하겠느냐. 여기에서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뜻을 이루도록 하여라"
주몽은 즉시 따르는 무리들과 길을 떠났다. 당시 그는 아내가 있었으나 임신을 한 몸이라 함께 떠날 수 가없었다.
도망치는 도중에 강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었다. 뒤에서는 추격 병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이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강을 건너려는데 다리는 없고 추격자들은 쫓아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외쳤다. 그러자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들이 수 없아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주봉 일행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추격하던 기마 병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주몽 일행은 모둔곡(毛屯曲)에 이르러 재사, 무골,묵거, 세 사람을 만났다. 주몽은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세 명의 어진 이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라며 이들의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고는 이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렀다. 그곳의 토양이 비옥할 뿐 아니라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도읍지로 정했으나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씨로 정했다. 이때 주몽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선,고구려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몇몇 부족을 이끌고 나와 졸본 지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해 건국한 국가라는 것,주몽이 자신을 하늘과 물의 자손으로 강조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기후와 물이 중요시되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는 것, 또한 그의 출생에서부터 건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했던 것에서 고구려의 건국 과정이 무척 험난했다는 것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금와의 탄생에서 금와가 금색을 띠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해부루가 아란불의 말에 따라 도읍을 옮긴 뒤 동부여라 했다는 부분에서는 해부루가 해모수와 영역 다툼을 벌이다 패배하고 새로이 나라를 세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앞뒤 정황으로 주몽이 금와의 이들인 듯하나 이야기는 유화가 해모수를 암시하는 햇빛의 정령을 받아 잉태했다고 전하고 더구나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커다란 알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 알은 개•돼지•말•소 같은 가축에게 까지 보호를 받는다. 이는 모두 하늘이 내린 큰 지배자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고구려의 왕권이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몽을 하늘의 자손으로 연결시켰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고구려에는 모두 다섯 부족이 있으니,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왕권이) 점점 미약해져서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후한서》 부분이나,“(고구려에는) 가장 높은 벼슬로는 대대로가 있다 대대로는 세력의 강약에 따라 서로 싸워 이기면 빼앗아 스스로 되고 왕의 임명을 거치지 않는다”는《제왕운기》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왕권이 강력했다고 는 볼 수 없다. 그랬기에 고구려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선조를 신성시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사실,주몽의 탄생을 전하는 이 부분은 부여의 건국신화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부여에서 이주하면서 부여의 신화를 가지고 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부여의 시조 이름이 고구려의 시조와 같은 동명왕 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고조선시대부터 동북아시아에 터를 잡고 있던 부여가 고구려의 보호 아래 들어와 492년 국가로서의 존속을 포기하자,고구려는 장구한 부여의 역사를 아우르고 오랜 역사를 지닌 부여의 시조 동명의 모습을 고구려의 건국 영웅 위에 포개어놓았던 것이다.
주몽이,훗날 왕이 되어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는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를 피해 무사히 부여를 탈출한 뒤 세 사람을 만나 고구려를 세운다는 것은,험난한 고구려 건국과정에서 다양한 토착세력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뜻한다. 단군이 하느님의 자손으로 자연스럽게 지배자가 된 것과 대조적으로 주몽은 탁월한 능력으로 역경을 극복하며 스스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한편,주몽신화가 일본 고대신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북한<문학신문〉의 보도는 흥미롭다. 이 신문은 단군신화가 일본의 신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학술적 논의는 많지만,주몽신화가 일본의 신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또,일본의 옛 문헌인《고사기》에 수록된 일본의 역대 천황 신화들 가운데 3~4세기를 배경으로 한 중애천황과 신공황후,아들 응신천황과 세 아들에 대한 신화가 고구려의 주몽신화를 그대로 모방,가공했다고도 덧붙였다.
이창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정신분석 전담교수의 분석도 눈길을 끈다. 그는〈한중일 영웅신화의 공통성과차이성에 대한정신 분석적 비교〉라는 논문에서 “주몽신화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아버지다움을 내면화하지 못한 채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힘없음에 대해 한스러움을 느끼는 권력콤플렉스, 그리고 이로 인한 형제콤플렉스가 두드러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몽신화를 중국의 순 임금 신화,일본의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신화와 비교하면서 중국과 일본 신화와 달리 주몽신화에는 어머니 이외의 여성 조력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유난스러운 ‘어머니 애착’ 을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라고 했다.
어쨌든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부근에 있던 비류국의 송양왕을 복속시켰을 뿐 아니 라 북옥저(北沃沮) . 행인국(荇人國) 등 작은 나라 들을 차례로 정복해 국토를 넓혀나갔다.
또한 오녀산에 1킬로미터 정도의 석성을 쌓아 한 국가의 도읍으로서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후 고구려는 외부의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기본 수단으로 많은 성을 쌓았는데 오녀산성은 그 시초가 되었다.
고구려가 차츰 그 기틀을 잡아나가고 있을 무렵 부여에 있는 아내 예씨와 아들 유리가 찾아왔다. 주몽은 기뻐하며 그를 태자로 봉 했고,넉 달 뒤 40여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유리가 바로 고구려 최초의 시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랑가라고 전하는 〈황조가〉를 쓴 고구려 2대 유리왕이다.
평가
고구려가 강국으로 성장해가면서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조 주몽을 신비화하기 시작했다. 5세기 초에 씌어진〈광개토대왕 릉 비문〉은 주몽의 일대기로 시작되는데 이 비문 속에서 주몽은 신비로운 출생 과정을 통해 성스러운 혈통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죽음조차 황룡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그려져 있다.
1935년에 발견된〈모두루묘지〉에서는 그 정도가 한층 더해져 주몽이 해와 달의 아들이며,세상에 내려와 고구려를 세운 신이라 했다. 묘의 주인인 모두루와 그의 선조들의 행적을 적은 이 글은 4~5세기 고구려 왕권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주몽이 신으로 숭배됨으로써 고구려의 왕들은 신의 자손이 될 수 있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