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신라의 달밤-현인///朴赫居世

bsk5865 2014. 10. 21. 10:3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0.21 06:43

 

신라의 달밤-현인///朴赫居世(D)|★....演歌 게시판

黃圭源 6 http://cafe.daum.net/enkamom/KTiH/6002 


신라의 달밤-현인


신라의 달밤-현인

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


아 ~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에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 신라의 밤이여
화랑도의 추억이 새롭 고나
푸른 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그치었네
화려한 천년 사직 간 곳을 더듬어며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아 ~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워라
대궐 뒤에 숲 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임들의 치맛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朴赫居世

생애와 업적

지난 2002년부터 2005년에 걸쳐 경북 경주시 탑동 나정()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만일 이곳이《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모두 박혁거세 탄생지로 지목한 신라시대의 그 나정이 맞는다면,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실존 인물이라고 쓴《심국사기》 초기 기록들이 사실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지금의 유적에서 우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곳이 박혁거세의 그 나정이 아니라는 주장과 또 나정이 우물이 아니라는 반론 등이 제기되면서 나정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논란 속에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데,그 표현이 지극히 신화적이다.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기원전 57) 갑자 4월 병진에 왕위에 오르니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었다. 그때 나아 열세 살이었다. 나라 이름을 서나벌 (徐那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설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를 알천 양산촌(閼川揚山村) 둘째를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셋째를 취산 진지촌(觜山珍支村,또는 간진촌) 넷째를 무산 대수촌 (茂山大樹村), 다섯째를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를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 했다. 이들이 후에 진한(辰韓) 6부가 된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 옆에 있는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가보니,갑자기 말은 볼 수 없고 다만 커다란 알 하나만 있었다. 그것을 깨어보니 갓난 아기가 나왔다. 데려다 길렀는데 여남은 살이 되자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했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했으므로 그를 높이 받들고 존경했는데,이때 그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고허촌장 소별공이 양산 기슭에서 알을 발견해 그 속에서 나온 혁거세를 키웠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소벌공 혼자가 아니라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해 키웠다고 적은 것이 다르긴 하지만,양산촌 나정 우물 근처에서 박혁거세를 발견 했다는 것은 같다.

먼저,이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조선의 유민들’이 진한 6부를 이루었다는 맨 첫 부분이다. 여기서 조선은 물론 고조선을 말한다. 《삼국사기》는“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었는데,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신라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한편《삼국지》 <위지동이전〉은 “진(奏)나라의 노역을 피해 망명해온 사람들”이 진한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어,진한의 구성원들이 고조선 망명객들과 연 나라 망명객 들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중부 이남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마한이었다. 마한 왕은 중국의 연 나라 망명객들이 대거 밀려오자 동쪽 땅을 내주고 살게 했다. 얼마 뒤 고조선 유민들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해왔을 때에도 동쪽 땅에 살게 했다. 이들은 한반도 남동부 지역에 머물며 진한과 변한을 이루었다. 이때까지 이들의 왕은 마한사람이었다. 이는 곧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왕위는 세습되었는데,만약 마한 출신 왕족의 혈통이 끊기면,다시 마한 왕이 새로운 왕을 파견하거나 지명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박혁거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진한 6부의 촌장이 모여 마한 사람이 아닌 진한 사람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한 것이다. 진한 출신의 왕이 탄생했다는 것은 진한이 비로소 마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삼국사기》는 박혁거세의 이야기 뒤에 왕비가 되는 알영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 우물가에서는 계룡이 나타나서 오른쪽 옆구리로 계집아이를 낳았다. 어떤 할멈이 이를 보고서 이상히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계집아이의 이름을 알영이라 했는데,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다. 단지 입술이 닭 부리 같았는데,월성의 북쪽 뱃물에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나갔다. 여기서 계룡의 옆구리에서 탄생했다는 구절은 청결한 출생을 뜻한다. 석가모니가 어머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탄생했다는 불교 설화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또한 입이 닭 부리 모양이었다고 한 것은 약간의 결점이 있었거나 고난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박혁거세가 열세 살아 되던 해 6촌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임금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왕은 흐듣고 왕비로 삼았다. 열새 살에 왕이 되었으니 초기에는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맹체의 상징적인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혁거세가 왕으로 있을 당시 신라는 주변의 작은 집단들을 정복하면서 영역을 넓혀갔으나 왜와 낙랑의 침입을 받았고 마한에 조공을 보냈다 서른한 살이 되던 재위 19년 변한이 항복해옴으로써 신라의 영역은 더욱 확대됐다 33세가 되던 기원전 37년 서라벌에 금성을 쌓았고,기원전 31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고 하는데, 한편에서는 이때를 신라가 실질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형성 형성하는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기원전 28년에는 낙랑이 침범해왔다가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가 있는 나라’라며 스스로 물러갔다는 기록이《삼국사기》에 전한다. 신라 군의 방비가 튼튼하고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어 있어 침략을 포기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기원전 20년 마한에 호공을 사선으로 보내어,마한 왕이 공물을 보내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그러자 격분한 마한 왕이 호공을 죽이려 했고 이에 호공이 당당히 맞대응 한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국력은 이때 이미 마한에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9년 마한 왕이 죽자 마한을 쳐서 평정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 지 못한 일”이라며 오히려 사신을 보내 조문했다. 기원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사신을 보내 말 20필을 바치기도 했다.

혁거세는 나라를 다스런지 61년 만에 죽어 사릉에 묻혔다. 《삼국유사》는 혁거세가 하늘로 올라간 7일 뒤 유체(遺體)가 땅에 흩어 져 떨어지자 왕후도 죽었는데,나랏사람들이 왕과 왕후를 합장하려 했지만 큰 이무기가 쫓아다니며 막아 머리와 팔다리의 다섯 부분을 따로 장사 지내 다섯 능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죽은 뒤 시신이 다섯 동강 났다는 이 기록으로 보아 아무래도 혁거세의 죽음이 자연사였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재위 60년 기사에“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에 벼락을 맞았다”라는 기사나 그의 뒤를 이은 남해 왕이“두분(혁거세와 알영)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이는 잘못된 일이다”라고 했다는 것으로 보아 아 마도 혁거세의 나이 일흔이 넘었을 무렵 왕권을 위협하는 반란이 일어났던 듯하다. 그 반란으로 혁거세와 알영은 험한 죽음을 맞지만 다행히 아들인 남해에게 왕권은 넘어갔다. 혁거세는 죽은 뒤 신 라의 국조신이면서 농경신으로 모셔졌다.


나정에 대한 논란

사적245호 경주 나정이 신라건국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02~2005년에 걸쳐 중앙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를 실시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은《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모두 박혁거세 탄생지로 지목한 신라시대의 그 나정이 틀림없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정 유적 에서 우물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따라서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축조수법이나 토층 양상으로 볼 때 우물이 아니라 기둥이 있었던 흔적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또다시 반론이 제기되었는데,그 핵심은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은 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어디를 봐도 나정이 우물 이라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으며, 이름에 우물 정(井)자가 들어간다고 꼭 우물 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때문에 지금의 경주 나정에서 우물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곳이 신라시대 나정이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라,오히려 신라시대 나전이었을 가능성을 더욱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