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人物函

逍遙山 自在庵과 元曉大師

bsk5865 2015. 1. 3. 11:51

보낸사람 : 김경동 15.01.03 08:34

 

逍遙山 自在庵과 元曉大師

 

소요산(逍遙山)은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있는 자재암(自在庵)으로도 유명하다.

아들 설총의 이두 이야기는 더 유명하지만...

자재암이 생긴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재암이 생긴 원효대사와 보살이야기를 읽어보자.

 

거센 비바람 속에서 얼핏 여자의 음성을 들었던 원효 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탓하며 다시 마음을 굳게 다졌다.

『아직도 여인에 대한 동경이 나를 유혹 하는구나.
이루기 전에는 결코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자세를 고쳐 점차 선정에 든 원효스님은 휘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빗소리를

분명히 듣는가 하면 자신의 존재마저 아득함을 느꼈다.

「마음, 마음은 무엇일까?」원효 스님은 둘이 아닌 분명한

본래 모습을 찾기위해 무서운 내면의 갈등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지직」하고 등잔불이 기름을 튕기며 탔다.
순간 원효스님은 눈을 번쩍 떴다.

비바람이 토굴 안으로 왈칵 밀려들었다.

밀려오는 폭풍우 소리에 섞여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스님은 귀를 기울였다.

  

 
『원효스님, 원효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스님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망설였다.
여인은 황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스님을 불렀다.

스님은 문을 열었다.

왈칵 비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방안의 등잔불이 꺼졌다. 

 

 

 

『스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찾아와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를 맞고 서 있는
여인을 보고도

스님은 선뜻 들어오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스님, 하룻밤만 지내고 가게 해주세요.』
여인의 간곡한 애원에 스님은
문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인이 토막으로 들어섰다.

『스님, 불 좀 켜 주세요. 너무 컴컴해요.』 

 

 

 

스님은 묵묵히 화롯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옮겼다.
방 안이 밝아지자 비에 젖은 
여인의 육체가 눈에 들어왔다.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 몸 좀 비벼 주세요.』
여인의 아름다움에 잠시 취해 있던 스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연히 들여놨나 싶어 후회했다.

 

 


  

떨며 신음하는 여인을 안 보려고 스님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비에 젖어 속살이 들여다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 내 마음에 색심이 없다면

이 여인이 목석과 다를 바 있으랴.』 

 

  

스님은 부지중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여인을 안아 침상에 눕히고는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기 시작했다. 

 

  

풍만한 여체를 대하자 스님은 묘한 느낌이 일기 시작했다.
스님은 순간 여인을 침상에서 밀어냈다.

「나의 오랜 수도를 하룻밤 사이에 허물 수야 없지.」

이미 해골물을 달게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깨달은 스님은 다시 자기 정리를 시작했다. 

 


  

「해골은 물 그릇으로 알았을 때는 그 물이 맛있더니,
해골을 해골로 볼 때는 
그 물이 더럽고 구역질이 나지않았던가.
일체 만물이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였으니
내 어찌 더 이상 속으랴.」 

 

 
이 여인을 목석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있는그대로의

여인으로 보면서도 마음속에 색심이 일지 않으면

자신의 공부는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다시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여인의 몸을 비비면서 염불을 했다.

 

여인의 풍만한 육체는 여인의 육체가 아니라

한 생명일 뿐이었다.

  


  

스님은 여인의 혈맥을 찾아 한 생명에게 힘을 부어주고 있었다.

남을 돕는 것은 기쁜 일.

더욱이 남과 나를 가리지 않고 자비로써 도울 때

그것은 이미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 되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을 때 사람은 경건해진다.  

 

  

여인과 자기의 분별을 떠나 한 생명을 위해 움직이는  원효 스님은

마치 자기 마음을 찾듯 준엄했다.

 

여인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스님 앞에 일어나 앉았다. 
 

 

  

여인과 자신의  경계를 느낀 스님은 순간 밖으로 뛰쳐 나왔다.
폭풍우가 지난 후의 아침해는 
 더욱 찬란하고 장엄했다.
간밤의 폭우로 물이 많아진 옥류폭포의 물기둥이
폭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스님은 훨훨 옷을   벗고 옥류천 맑은 물에 몸을 담그었다.
뼛속까지 시원한 물 속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데

 여인이  다가왔다.

 

『스님, 저도 목욕 좀 해야겠어요.』 

 

 

 여인은 옷을 벗어 던지고는  물 속으로 들어와
스님 곁으로 다가왔다.

  

  

아침 햇살을 받은 영인의  몸매는 눈이 부셨다.

스님은 생명체 이상으로 보이는 그 느낌을 자제하고 항거했다.

결국 스님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호호호, 스님도.
어디 제가 스님을 유혹  합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시면서.』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순간  스님의 머리는 무한한 혼돈이 일었다.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이란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스님의 귓전을 때렸다.

 

 

거센 폭포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하여 여인의 음성이 혼돈으로 가득 찬 머리 속을 후비고 들어올 뿐.

「색안으로 보는 원효의 마음」을
거듭거듭 뇌이면서

원효스님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폭포소리가  들렸고 캄캄했던 눈앞의 사물이

제 빛을 찾고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의식되는 눈앞의 경계를 놓치지 않고 원효 스님은

갑자기 눈을 떴다. 원효스님은 처음으로 빛을 발견한 듯

모든 것을 명료하게  보았다.

「옳거니,  바로 그거로구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그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 도리-」 

 

 

 

스님은 물을 차고 일어섰다.

그의 발가벗은 몸을 여인 앞에 아랑곳없이 드러내며

유유히 걸어나왔다.

주변의 산과 물,  여인과 나무 등 일체의 모습이 생동하고  있었다.
여인은 어느새 
금빛 찬란한 후광을 띤 보살이 되어
폭포를 거슬러 사라졌다.

 

원효 스님은 그곳에 암자를 세웠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뜻대로 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자재암" 이라  했다. 

 


 

지금도 동두천에서 멀지 않은  단풍으로 유명한
소요산 골짜기에는 
보살이 목욕했다는 옥류폭포가 있고

 

 

 

그 앞에는 스님들이

자재의 도리를 공부하는
"자재암"이  있다.

 

 

 

원효불기설화[元曉不羈說話]

 

고승 원효의 일생을 꾸민 설화이다. 삼국유사는 원효의 설화 7편을 소개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삭이 된 원효의 어머니가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해산했다는 사라수(娑羅樹) 이야기.

 

절을 주관하는 이가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에 밤 두 개씩만 주었는데 불만을 품은 종이 관가에 송사했다. 관가에서 그 밤을 살펴보니 밤 하나가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오히려 한 개씩 주라는 판결을 내리고 그 골짜기를 율곡이라 했다.

 

원효의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천성이 총명하여 원효는 스승없이 깨쳤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我斫支天柱). ”원효가 이렇게 외치는 노래를 듣고 태종 무열왕이 궁리를 보냈더니 문천교를 지나던 원효는 물로 떨어져 요석궁(瑤石宮)에서 옷을 말리게 된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요석공주는 잉태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을 낳은 뒤 원효는 파계승으로 큰 표주박을 얻어 무애()라 이름하고 방방곡곡을 노래하고 춤추며 몽매한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원효는 소를 타고 가면서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를 소의 두 뿔 위에 놓고 썼다. 이 각승(角乘)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가지 깨달음을 나타낸다.

 

원효가 입적(入寂)했을 때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서 분황사(芬皇寺)에 안치했다. 설총이 절을 하자 원효상이 돌아보았는데 그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설()원효는 법명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출신은 압량(押梁: 지금의 慶山郡) 불지촌(佛地村)이다.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648(진덕왕 2) 황룡사에서 스님이 되어, 각종 불전을 섭렵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650(진덕여왕 4)에 의상과 함께 당()의 현장과 규기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입당(入唐)하기 위하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다. [사진자료 : 범어사 미륵암 벽화]

 

이후, 655년에서 660년 사이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는데,  이 실계(失戒)의 사실이 오히려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계 후,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롱(舞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無碍)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그 노래의 줄거리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 라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랫가락인데,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친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여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어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고, 혹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는 또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는 등 대중들과 쉽게 만날 수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일생은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석가 이후 '상구보리 하화중행'으로 대표되는 불타의 참 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