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3.14 13:09
正祖의 生涯와 業績
업적
正祖
생몰 년도: 1752(영조 28)-1800년(정조 24)
재위 년도: 1777년~1800년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시호: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列聖仁莊孝王)
활동분야: 왕
다른 이름: 이산(李 )선황제(宣皇帝)
생애와 업적
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 아침,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왜 자결하지 않느냐 다그치는 영조 앞에서 사도세자는 허리띠를 목을 맸지만 시강원 강관들이 달려와 매듭을 풀고 의관이 약을 먹였다. 영의정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을 비롯한 대신들은 문밖에 모여 있을뿐 어느 누구 하나 세자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세손이 들어와 세자 뒤에 엎드리며 할아버지께 청했다.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
영조는 세손을 빨리 데리고 나가라며 호통 쳤고,열 살의 세손은 군사들에게 안겨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던 그날의 기억은 평생 세손의 삶을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가 된다 그가 끌려나 온 직후 스물여덟 살의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여드레 만에 삶을 마쳤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조에게 아버지를 앓은 슬픔뿐 아니라 죄인의 아들’ 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당시 조정은 자신들의 뜻에 맞서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노론이 주도하고 있었는데,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조정은 다시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그렇지 않은 벽파(僻派)로 갈렸다. 외척 중심의 노론이 벽파가 되고,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했다.
벽파는 차가운 시선으로 세손을 감시했다. 세손이 왕위를 이은 뒤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 든다면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무렵 세손은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잠을 잘 만큼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죄인의 아들이 왕위를 이을 수 없다는 주장에 영조는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세손을 입적시켜 보호했다. 아들은 죽게 했지만 손자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했던 세손을 영조는 무척 아꼈다.
1775년 어느덧 스물세 살이 된 세손에게 이미 여든 살이 넘은 영조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벽파의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영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여든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먼저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여 노론 벽파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또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벽파인 홍인한•정후겸 등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힘들었던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필해준 홍국영을 도승지 및 숙위대장으로 삼고,날랜 병사들을 뽑아 왕궁을 호위하게 했다.
정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을 수 있는 새로운 인재들이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聞) 설치를 서둘렀다. 이곳에 많은 책을 보관하게 하고,역대 왕의 문서와 서적들을 수집해 보관했다. 그리고 인재들을 모았다.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기존의 정치 세력에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면서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을 배치했다. 능력과 학식이 있어도 신분의 장벽에 벼슬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 진출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규장각을 중심 으로 임 진자(王辰字). 정유자(丁西字). 한구자(韓構字)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대전통편》.《문원보불》.《동문휘고》 등의 책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독자적인 군사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했다. 훈련도감이나 어영청•금위영 등 왕의 직속 군대가 이미 있었지만,이들은 노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蕩平策)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했던 노론 벽파도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과 정조의 탕평은 그 의미가 달랐다. 영조가 각 붕당에게 당파적 입장을 떠날 것을 요구했던 반면 정조는 각 붕당의 명분을 모두 인정했다. 노론•소론• 인 각각의 명분과 의리를 인정하면서 이들 간의 견제구도를 마련하고 그 위에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했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높인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나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 등에서 정조는 남인학파와 가까웠고,노론 중에서는 당시 북학사상을 형성하고 있던 젊은 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실학파와 북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장려하면서,문화의 저변 확산을 꾀하여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도 적극 지원했다.
조선시대의 왕은 정기적으로 경연(經筵)에 참여해 학문이 높은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정조는 역대 어느 왕보다 경연에 적극적이었다. 정조는 때로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적 능력을 갖춘 학자이기도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었다는 정조는 ‘내가 일찍이 독서하다가 밤중에 이르러 졸음이 오려 하는데 홀연히 들려오는 닭 우는 소리에 졸음은 사라지고 청명함이 되살아나 본심을 되찾았다”며 밤에 열린 경연에 참가해 졸음을 참고 있는 신하들을 독려했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서얼들을 기용하고 조선시대 정치적•사회적으로 꺼려했던 서북 출신 이응거를 한성판윤에 삼는 등 소외된 사람들에게 조정의 문을 열고,어느 임금보다 암행어사를 많이 파견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지방 관리들의 부정을 막기 위해 애썼던 정조에 대해 일부 반대 세력을 제외하고는 성군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벽파의 견제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이들에 맞서기 위해 정조는 채제공을 앞세운다. 정조 17년 채제공이 중심이 되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제 사도세자를 죽인 자들을 처벌하라는 내용이었다. 노론 벽파들은 크게 당황했고,정국은 큰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때 정조가 중재에 나서,채제공의 주장은 역적을 토별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윤리의 기강을 바로잡자는 것이라며 양쪽을 다독거려 사태를 수습했다. 이러한 정치적 수완을 통해 정조는 노론 벽파에 대해 경고하고,채제공을 중심으로 벽파에 맞서는 세력들을 결집해나갔다.
그리고 이 해부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화성)을 새롭게 꾸미기 시작했다. 장용영을 내영•외영으로 재편하며 외영의 본영을 수원으로 삼고,이듬해부터 수원성을 건설해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했으며,행궁을 설치한 뒤 자주 행차했다.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정조가 화성으로 서울을 옮겨 새로운 정치 • 경제적 기반 위에서 국정을 운영하려 했다는 천도설과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혹 은퇴한 뒤 수원에 머물면서 이들 순조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사업을 추진시키려 했다는 상왕설이 그것이다.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사업이란 자신의 부모,즉 사도세자와 혜경궁을 정식 왕과 왕비로 추존하는 일을 말한다. 정조 자신은 영조로부터 영조의 처분을 지킬 것을 부탁 받았기 때문에 사도세자를 추존하는 사업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고,자신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산소 옆을 지키며 살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꿈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 상왕설이다.
하지만 천도든 상왕이 되는 것이든 정조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마흔아홉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갑작스런 죽음이었기에 정조의 죽음이 독살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그의 죽음 직후부터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인화의 소설《영원한 제국》에 이르기까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그러나 독살의 명확한 증거는 알려진 바 없고, 기록에는 종기간 악화되어 죽었다고 전한다.
그의 죽음 뒤 열한 살의 순조를 대신한 정순왕후의 섭정이 이어 지는데, 이는 벽파의 재집권을 의미한다. 남인은 천주교 박해를 계기로 몰락하고,이후 순조의 친정을 계기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世道政治)가 시작된다.
평 가
정조에 대해서는 탕평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끌어내고 문화의 중흥을 이룩한 군주 라는 교과서적 평가에다가 근래에 와서‘근대를 향해 개혁을 시도하다가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독살된 비운의 탕평군주’라는 소설적 평가가 덧붙여져 있다.
정조는 당대에나 현재에나 많은 아쉬움을 남기는 왕이다. 영조 에 이어 탕평책을 펼치며 18세기 정치개혁과 문화중흥을 이끌었지만,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려•놓고 만다. 정조가 추진했던 개혁들이 그의 사후 전면적으로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오랜 전통을 가진 문별 양반 출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지 못했고,제도개혁보다 실력주의에 입각한 점진적인 개혁을 표방했으며,토지개혁과 상공업강화책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또한 정조가 직접 고른 며느리가 김조순의 딸이다 보니,결과적으로 정조 스스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길을 열어놓은 셈이 되고 말았던 점도 아쉽다. 정조 대에 대사성 등을 지낸 이만수는 정조의 행정에 다음과 같이 썼다.
‘왕은 하늘에서 타고난 총명과 슬기에다 너그럽고 인자하고 검소한 마음씨를 가졌다 이 세상의 갖가지 재주가 모두 왕의 쓰임이 된 것이다 바로 성인 중에도 더욱 성인이었던 것이다" 왕의 행장은 대부분 칭찬 일색이지만 이렇듯 극찬을 한 행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채제공
’1720~1799. 영조 때 도승지로 있으면서 영조가사도 세자폐위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다. 그 후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세손의 교육에 참여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판서 겸 의금부판사로서 정조의 정책을 보필했다.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8년간 은거 생활을 하다가,1788년 정조의 특명으로 우의정이 되었으며 그 후 좌의정,영의정을 지냈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 노론 벽파에 의해 추탈 관작 되었다가 1823년에 신원되었다.
정순왕후
1745~1805. 영조의 계비. 정성왕후(貞盛王后)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음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친정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가 정조 대에 시파와 대립하는데 중요한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1800년 순조가 열한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실시했는데,스스로 여자국왕〔女主 • 女君〕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했다. 천주교를 탄압하고 남인들을 축출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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