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二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 넉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세계의 글자 중에 으뜸 이도다 한글은 우리 자랑 민주의 근본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三 한 겨레 한 맘으로 한데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바른 길 환한 길로 달려나가자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 나라에 한글은 우리 자랑 생활의 무기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世宗
생몰년도: 1397년(태조 6)-1450년(세종 32) 재위 년도: 1418년~1450년 자; 원정(元正) 시호; 장헌(莊憲) 활동분야 ;왕 다른 이름: 이도(李祹)
생애와 업적
1418년 8월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왕세자에 책봉된 지 불과 두 달만의 일이었다. 태종은 충녕이“천성이 총명하고,민첩하고,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또한‘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늘 큰일에 의견을 내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여 왕위를 맡을 만하다며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하고 왕위를 잇게 했다.
풍류를 좋아하고 무인 기질이 다분했던 양녕이 군왕의 덕행을 쌓을 것을 요구하는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해 태종의 마음이 떠난 것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지만 야사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태종의 마음이 충녕에게 있는 것을 안 양녕이 일부러 미치광이 짓을 해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또 형제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끝에 왕위를 쟁취한 태종이 자기 아들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무인기질의 양녕보다 온화한 충녕을 택했다는 최근의 주장도 있다.
세종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열중하고 무섭게 공부했던 군주이다.지나치게 독서에 열중하자태종이 책을 모두 치워버리고“과거를 볼 사람도 아닌데 왜 이렇게 폼을 고단하게 하느냐”고 했다는 말이 전할 정도이다. 세종 스스로 경서는 모두 100번씩 읽었고, 딱 한 책만 30번을 읽었으며,경서 외의 역사와 기타 책들도 꼭 30번 씩 읽었다고 했다.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는 바람에 국왕이 되기 위한 훈련이 부족했던 세종은 재위 초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상왕께 사뢰어보겠다”는 대답을 해야 될 만큼 어려운 입장이었지만,최대한 인내하고 공부하며 집권 초기를 무사히 보냈다.
1422년 태종이 죽고 재위 4년 만에 전권을 행사하게 된 세종은 태종이 만들어놓은 정치적 안정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마음 것 펼치기 시작했다. 태종이 잡아놓은 국가의 골격을 완성해나가는 방법으로 세종이 택한 방법은 매우 학구적이다. 선현의 지혜를 신뢰했던 세종은 우선 역사와 경전을 뒤져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여기에 현재 거칠게 만들어져 있는 제도를 세부 사항까지 세밀하게 규정해,관련 규정을 대폭 보완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렇게 접근하다 보니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우리의 사서들이 너무 부실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종은《고려사》.《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을 다그쳤다. 중국의 사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완질을 구해 입고 학자들을 동원하여 이에 대한주석서인《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는데,이 주해 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것 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전과 사서에서 찾아낸 제도를 적용하려면 우리 땅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세종은 지방관들에게 각 지역의 지도•인문지리•풍습•생태 등에 관한 정보를 요구했고,이를 수합하여 편찬했다. 갑자기 많은 자료를 간행하려다 보니 인쇄술이 진일보해 세종 치세에 인쇄 속도가 10배로 성장했다.
또 이렇게 많은 내용을 연구하려니 학자들이 필요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 기능을 확대하고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을 모아들였다. 세종의 특별한 관심과 대우를 받았던 집현전 학자들은 주로 각종 서적 편찬과 세종의 정치 자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들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을 도와 세종 최고의 업적인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사실 훈민정음을 세종 혼자서 만들었는지 세종의 지시에 따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아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어떤 결론에 이르기는 어려울듯싶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書雲觀)이 설치되어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박언연을 등용해 아악을 정리하고 맹사성을 통해 향악을 뒷받침하여 조선에 적합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국토의 개척도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새로운 화기를 개발하고 수십 년간에 걸친 군제 정비 결과,김종서를 보내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하고 압록강 방면에 사군을 설치해,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지방을 우리 영토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윤리•농업•지리•천문•음양•측량•수학•약재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편찬하고,관료•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들을 새로 정비했다. 이때 정해진 규정들은 나중에 조선에서 시행된 모든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이렇듯 다양한 분야에서 초인적인 연구를 해나가다 보니 세종은 일찍부터 육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풍질이 발병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4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하루 종일 앉아서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나빠졌다. 스스로 체력이 딸리니 생각이 이전처럼 주밀하지 않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집권 후반기에 세종은 태종이 마련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인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개편하고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결재토록 해,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분산시켰다. 건강상의 이유이기도 했지만,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많은 유학자들로 인해 자신의 유교적 이상을 실현시켜줄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신권과 왕권이 조화된 유교적 왕도 정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면서도 새로 편찬된 책들을 수십 권씩 직접 검토하던 세종은 1450년 2월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두었다.
평 가
세종이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황희•맹사성•최윤덕 등 대신들의 신중한 보좌와,김종서•박연•장영실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인물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유교와 역사에 대한 소양,과학과 음악 등 여러 분야에 대한 탐구력,우리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주체성,의지를 관철시키는 추진력,백성에 대한 애정 등을 지닌 세종이 지시하고 이끌었기에 가능했던 일 들이다.
정군’또는 ‘대왕’이라는 호칭이 붙는 세종은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인물이다. 당대에 이미‘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려 지금까지 비판이 금기시되다시피 했으며,오히려 초인화•신화화된 부분마저 있다. 이러한 신격화는 역사의 효용과 가치를 신뢰했고 역사란‘사실을 빠짐없이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세종이 누구보다 원하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사실 신격화의 포장을 한 겹 벗겨버린다 해도 세종이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었다는 사실에 반론이 제기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집현전
조선 초기 세종을 도와 학문을 연구하던 기관. 그러나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집현전이라는 이름을 처음 쓴 것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였다. 우리 역사에 집현전이란 이름을 가진 관서가 처음 생긴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6년이다 충렬왕 때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조선 정종 때 다시 설치되었고,임금에 대한 고문역할,학문의 연구,각종서적의 편찬,도서의 수집 정리 동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대에 이르러서이다 세종 때 집현전을 재정비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 정치와 명나라와의 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유만한 소장 학자들을 뽑아 집현전을 채웠고,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으며,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1456년(세조 2) 사육신을 비롯하여 반대파가 집현전에서 많이 나오자,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소장서적은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했다.
박 연
1378(우왕 4)~1458(세조 4),세종 때의 음악이론가1405년에 생원,1411년 진사에 급제했으며 그 뒤 집현전교리,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세자시강원문학,봉상판관 겸 악학별좌,관습도감사,공조참의,중추원사,보문각제조,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세종을 도와서 음악을 정비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으며,특히 흘관 제작에서 성공하여 편경을 만드는 등 조선초기 음악정비에 많은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