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나는 울었네-김희갑///鄭道傳

bsk5865 2014. 12. 31. 09:10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4.12.31 06:23

 

나는 울었네-김희갑///鄭道傳(D)|★....演歌 게시판

黃圭源 http://cafe.daum.net/enkamom/KTiH/6503 


나는 울었네-김희갑


나는 울었네-김희갑

작사 김동일 작곡 박시춘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날 속일 줄
나는 울었네, 나는 울었네 나루터 언덕에서
손목을 잡고 다시 오마 던 그 님은 소식 없고 나만 홀로
이슬에 젖어, 달빛에 젖어 밤 새도록 나는 울었네


나는 속았네, 나는 속았네 무정한 봄바람에
달도 기울고, 별도 흐르고 강물도 흘러갔소
가슴에 안겨 흐느껴 울던 그대여 어디 가고 나만 홀로
이 밤을 새워 울어보련다 쓸쓸한 밤 야속한 님아


님도 울어라, 님도 울어라 지나간 옛추억에
물새 나르던, 물새 나르던 아득한 그 옛날 밤
그대는 가고, 세월은 흘러 오늘도 강 언덕에 홀로 앉아
별 하나, 별 둘, 헤어가면서 잊지 못해 우는 밤이여


鄭道傳


자; 종지(宗之)
호; 삼봉(三峰)
시호: 문헌(文憲)
활동 분야: 정치,학문
생애와 업적

“이 군사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1383년(조선 건국 9년 전) 가을, 함흥에 있는 이성계의 군막을 찾아온 정도전의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이성계에게“동남쪽을 침구하는 왜를 친 다음 말이외다 라고 둘러댔지만 그로부터 9년 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션을 개국한다.

이 무렵 이성계는 승전을 거듭하며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반면 정도전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정도전은 1342년 경북 영주에서 밀직제학(密直提學) 형부상서 (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앙 관리였지만,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왔던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이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첩의 딸이었고,외할머니는 승려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출신 배경은 정도전의 벼슬길에 두고두고 적지 않은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인연으로 정도전은 이색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진사시 에 붙어 충주사록(忠州司錄). 전교시 주부(典敎寺主簿). 통례문지후(通禮門祝候)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이후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과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하며,{고려사) <열전〉에 “임금은 그를 몹시 사랑했다”는 기록이 전할 만큼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 성장해갔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에 적극 동참하던 그에게 왕의 허무한륙음은 첫 번째 시련이었다.

공민왕 사후 친원 세력이 정권을 잡고 반원파 개혁 세력들이•수세에 몰렸다. 친원 세력은 공민왕 대에 끊어진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해달라고 요청하는 글을 원나라에 보냈다. 이때 정도전 등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달 뒤 원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고 사신이 오자 친원 피들은 사신을 영접하는 자리에 정도전을 천거했다. 친원파의 함정이었다. 만일 이 벼슬을 받아들이면 명분을 꺾는 것이 되고, 이를 거부하면 임금의 명을 어긴 죄를 받을 것이다. 이에 정도전은“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오겠다. 그렇지 않으면 원나라 사신을 묶어 병나라에 보내겠다”며 강력하게 반발했고,친원파는 기다렸다는 듯 정도전을 비롯,이숭인 김구용•권근 - 정몽주 등을 유배 보냈다.

이후 10년 동안이나 정도전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채 지냈다. 3년 뒤 유배에서는 풀려났지만,고향 영주에서 4년간 칩거했고, 이후 한양의 삼각산 아래에 초막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당시 그는 5년 동안 네 번이나 집을 옮겨다녀야 하는 등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밭농사를 배우고 약초를 가꾸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려 말 권문세족에게 땅을 빼앗기고 왜구들에게 쫓기는 하층민의 삶을 체험했다. 민심이 이미 고려 조정을 떠났다고 판단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벼슬길에서 멀어진 지 9년째 되던 어느 날 정도전은 생면부지의 이성계를 만나러 함흥으로 간다.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함께 건설할 인물로 이성계를 선택한 것이다. 정도전은 올바른 정치의 핵심은 올바른 정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올바른 정권이란 민심을 따르는 정권이라 했다. 그는 1394년에 완성한 《조선경국전》에서 “민심을 얻으면 민(民)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라고 하여 역성 혁명을 옹호했다.

상당히 급진적인 사상인 역성혁명사상은 사실 맹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탕황이 폭군 걸왕을 내 좇고 은나라를 세운 것이나 무왕이 주왕을 내쫓고 주나라를 세운 것이 옳은 일이냐고 제나라 선왕이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인을 해치는 자를 흉포하다고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학하다고 하고,흉포하고 잔학한 인간을 일개 범부라고 하니,일개 범부인 주를 죽였다는 벨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인의를 해친 임금은 임금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임금답지 못한 임금은 죽여도 괜찮다는 이 급진적인 사상을 바탕으로,정도전은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물로 이성계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갚게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뒷날 정도전이 목숨을 앓을 때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정도전에게도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명나라와의 외교분쟁을 해결할 인물로 정몽주가 천거되었고,정몽주는 자신을 따라갈 서장관(徐狀官)으로 정도전을 지목했다. 자칫 목숨을 앓을 수도 있는 어려 운 자리였지만 정몽주와 정도전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해,정도전은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정도전은 위화도회군 뒤 조준 등과 전제개혁안을 단행하고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 이성계 과의 급성장을 견제한 정몽주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 생활을 경험 하기도 하지만,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1392년 마침내 조준•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운 그는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의 실현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토대를 잡는 데 정도전이 한 역할은 엄청나다. 우선《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국가의 제도와 운영의 틀을 잡았으며,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다. 군사력을 확충하고자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로 하여 《오행진출기도》《강무도》 등의 병서를 짓고 이에 따라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했다. 또한 《경제문감》을 저술해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확립했고,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고려국사》37권을 편찬했다. 지방 행정 방법을 기술한 《감사요약》을 만들어 지방 행정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전의 이러한 적극적인 노력은 이방원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와 뜻을 같이해 방석을 세자로 세우고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꿈꾸었다. 그러자 개국의 최대 공로자라 할 수 있는 이방원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이 사병 혁파까지 실시하려 하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정도전이 요동 정벌에 몰두해 있는 사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 일파가 왕의 사후에 어린 세자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복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눈치 챈 이방원이 먼저 기습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이 또한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어쨌든 이 기록으로 정도전은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적손의 여러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 역적으로 낙인 찍히고 만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심효생 이근•장지화가 죽고,세자인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살해당했다.

정도전은 평소에 이성계와 자신을 한나라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조선의 건국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조선시대 내내 역적의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평 가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이성계는“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 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 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벼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있다” 고 했으며,술에 취할 때마다“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정도전의 공을 치하했다? 신숙주도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선생이 골라 정한 것으로 당시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는 글을 남겼다.

그러나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역적의 굴레를 씌웠고,조선시대 내내 역적의 이름을 벗지 못했다. 또한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는“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꼭 해치려 하고,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하였으며,언제나 임금에게 권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위염을 세우자고 하였다’며 정도전을 깎아내렸다. 한때 자신을 가르쳤던 이색을 죽이자고 탄핵했고 동문수학했던 이숭인을 죽인 것을 비난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정도전에게 호감을 표시한 왕은 단 두 사람,영조와 정조뿐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해 정도전을 복권시켜주었다. 어려운 집권 과정을 거쳐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구했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다.

반면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보수파 성리학자였던 송시열은 블사이군 이라는 유교의 계율을 어긴 정도전을 거론할 때마다‘간신’이라는 이름을 쓸 만큼 적대적이었다.

서장관

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던 사행에는 양국 협약에 따라 규정된 인원을 보냈는데,서장관은 정사(正使). 부사(副使)와 함께 3사(使)라 하여 외교 실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기록관이라고도 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