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영월의 애가-배호///世祖

bsk5865 2015. 1. 24. 21:40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1.24 06:33

 

영월의 애가-배호///世祖(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6652 


영월의 애가-배호


영월의 애가-배호

作詞 崔致守 作曲 裵相台


바람을 타고 말 위에 앉은 건가
말을 타고서 바람을 재촉하나
단종 단종 어린 단종 단종이 귀양 가던 날
아 - 울었다 산천도 울었다 영월땅도 울었다


물결을 타고 한강에 앉은 건가
한강을 타고 물결을 재촉하나
단종 단종 어린단종 단종이 떠나 가던 날
아 - 울었다 남산도 울었다 한강수도 울었다


世祖

생몰년도: 1417년(태종 17)-1468년(세조 14)
재위 년도: 1455년-1468년
자; 수지(粹之)
시호: 혜장(惠莊)
활동분야: 왕
다른 이름: 이유(李瑈)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홈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홉款蕭仁孝大王)


생애와 업적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아버지를 닮아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몸이 약했다. 문종은 2년 3개월의 재위 끝에 짧은 삶을 마감하고,열두 살의 단종이 왕위를 이었다. 어린 왕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있었지만,당시에는 어린 단종을 보호할 대비도 없었다.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에게 어린 임금을 잘 보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은 아직 어린데 한창나이의 동생들이 강성(彈盛)하니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당시 서른여섯,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서른다섯이었다.

단종 초 정국은 어린 단종을 보필하며 의정부의 재상들이 이끌었다. 세종 대에 북방을 개척한 명장 김종서가 최고 실력자였다. 재상들은 종친 가운데 한 명을 정사에 참여시키기로 했는데, 그들이 선택한 인물은 안평이었다. 무장 기질의 수양보다는 선비 기질의 안평이 정치 파트너로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성격이 강할 뿐 아니라 왕권중심주의자였던 수잉본 대신들이 이끄는 정치체제를 왕권의 약화로 보았고,더구나 안평이 그들과 손을 잡자 자신의 입지가 더욱 좁아들 까 우려했다. 수양은 권람•한경회•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끌어들이며 자신의 힘을 키워나가는 한편,명나라 사은 사 길을 자청하여 명나라의 신임을 얻는 등 차근 차근 야망을 키워나갔다.

1453년 10월 10일 밤,마침내 수양은 조정 최대의 권력자이자 정력인 김종서의 집을 찾아갔다. 품속에 편지를 가져왔다며 김종서를 가까이 오게 한 뒤 함께 데리고 간 사람을 시켜 철퇴로 머리를 내려치게 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시작이다.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은 궁으로 들어가 단종에게“전하가 어린 것을 경멸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하기에 부득이 김종서 부자를 죽였으나,황보인 등이 아직 있으므로 처단하기를 청한다”고 보고했다. 김종서가 죽었다는 소식에 단종은 수양의 손을 잡고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라며 빌었다. 기선을 잡은 수양은 왕명을 빙자해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죽였다 조선 개국 이후 초유의 대학살이었다.

계유정난은 성공했고, 수양은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겸하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사실상의 실권을 모두 장악했다. 또한 거사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한확•권람•한명회 등 43명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하고 토지와 노비 등 막대한 부상을 내렸다.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대규모 살육전은 계속되었다.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고,김종서•황보인 등의 아들•손자들까지 처형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55년 윤6월 마침내 단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올맀다. 왕위에 오른 뒤 또 한차례의 공신이 책봉되었다. 임금이 되는 것을 도왔다는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이번에는46명이 책봉되었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혔지 만 1456년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일명 사육신(死六臣) 사건이라 불리는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 나자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해 영월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1457년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죽이고,단종도 죽여버렸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세조는 왕권강화정책에 착수했다.

먼저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육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켰으며,시육신 사건을 빌미로 집현전을 폐지했고,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經筵)을 없냈다.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대간(臺諫)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의 기능을 강화했다.

그리고 지방 관리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을 파견했다. 이 정책으로 지방호족들의 불만이 쌓여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호패제를 강화했고,진관체제(鎭管體制)를 실시해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했으며 중앙군을 5위 제도로 개편했다. 북방 개척에도 관심을 기울여 선숙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여진족을 소탕하게 하고,강순•남이•어유소 등으로 여진족을 소탕하게 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썼다. 남쪽지방의 백성을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에도 힘썼다.

경제정책으로는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까지 나눠주던 과전(科田)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를 실시해 국가 수입을 늘렸다. 또한 궁중에 잠실을 두어 비와 세자빈에게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했으며,《금양잡록》.《사시찬요》.《잠서주해》 등 많은 서적 등의 농서를 간행해 농업을 장려했다.

집현전을 폐지하기는 했지만 문화와 교육 면에도 제도를 정비하고,《국조보감》.《동국통감》.《경제육전》.《속육전》등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성종 때 완성하는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한 것도 세조 때의 일이다.

한편,불교를 숭상하여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법화경》.《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기도 했다.

세조는 1468년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세조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정희왕후 윤씨를 비롯해 두 명의 부인에게서 4남 1녀를 두었다.


평 가

세조는 즉위의 정당성에 커다란 흠집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국가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괜찮은 왕이었다. 즉위하자마자 수령의 탐욕이나 잘못된 행정에 대한 고소를 허용한다는 세종의 결정을 재천명하고 백성들이 쉽게 고소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는 등 애민정책을 폈으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상명하달 식의 국정 운영은 세종•문종 대의 문치 정치를 후퇴시켰고,공신들의 권력 남용으로 비리가 누적되었다. 공신들은 세조에게 필요악이었다. 정통성 없는 정권을 세우고 지탱하는 데 공신들의 힘은 절대적이다. 세조는 이들을 우대해 역모가 아닌 이상 죽이지 않고 보호했다. 이후 이들은 훈구파(勳舊派)되어 나라의 모든 정치•경제•사회적 특권을 독점했다. 법 위에 존재하는 이들의 부패는 많은 백성들의 삶을 몰락시켰고,이들의 횡포는 향리에 은거해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불러낸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 곧 사화(士禍)의 시대는 세조에게서 비롯되었다.

한편,일제시대의 소설가 이굉수는《단종애사》에서 세조를 권력의 찬탈자자로 묘사했으며,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소설가 김동인은《대수양》에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려 했던 힘있는 군주로 세조를 그렸다.


금성대군

1426~1457. 세종의 여섯째 아들. 단종의 숙부이며 세조의 동생 이다 455년(단종 3)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 혐의로 삭녕 에 유배되었다가 광주로 옮겨졌다. 1456년(세조 1) 사육신 사건 때 연루되어 순흥에 안치되었는데,그곳에서 다시 순흥 부사 이보흠(李南款)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 편에 가담했으나,홀로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육조직계제

조선 초기에 정도전에 의해 실시된 의정부 서사제는 6조 의정부-왕으로 모든 현안을 의정부에서 논의한 뒤 왕에게 올리도록 한 반면,육조직계제는 6조에서 왕에게 직접 올리도록 한 제도이다. 조선 태종과 세조가 시행했으며,강력한 왕권을 위해 대신들이 모인 의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왕이 직접 육조를 관리하는 것이다.


이시애의 난

1467년(세조 13) 함경도 회령부사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함경도는 토지가 척박할 뿐 아니라 국경 경비에 드는 비용 등이 많아 중앙정부에 내는 세금이 적었다. 그러나 세조 때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면서 그 지방 출신이 임명되던 수령 자리에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고 백성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세금 부담도 커졌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둔 수령들은 대개 남쪽 지방 출신이었다. 이때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며“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 올라와서 함경도 군민(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군인과 백성들이 합세했다. 반란군은 약 4개월간 격렬히 저항했지만,5만의 정부군에 토벌되었다.


진관체제

세조 때 확립된 군대의 작전체제를 말한다 지역 단위의 방위체제로서 이시애의 난 등 여러 반란을 겪으면서 세조는 소규모 전쟁에 즉각 대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러 지역에 고루 군대를 배치하는 진관체제를 확립했다. 여러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는 만큼 군대의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전면전에서 약점을 드러내는 진관체제를 보완하기 위해 훗날 제승방략 체제가 등장한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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