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야곡-남인수 작사 백호 작곡 박시춘
一 밤안개가 스며드는 창문에 기대앉아 외로 히 들려오는 기타소리 들으니 흘러간 시절 사랑시절 마음속에 다시 그리워 이 한밤도 쓸쓸하게 갈매기 울고 가는 바다 위엔 밤비만 소리 없이 나리네
二 등대 불이 깜박이는 항구에 밤은 깊어 밤새껏 들려오는 기타소리 처량해 흘러간 청춘 그 시절이 가슴속에 다시 새로워 똑딱선의 고동소리 이 밤도 깊어 가는 바다 위엔 밤비만 소리 없이 나리네.
成三問과 申叔舟 명분과 실리의 차이인가 국기관의 차이인가 성삼문과 신숙주
成三問 생몰년도: 1418년(태종 18)-1456년(세조 2) 자: 근보(謹甫)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활동분야; 학문,정치
申叔舟 생몰년도: 1417년(EH종 17)-1475년(성종 6) 자: 범옹(泛翁) 호;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齊) 시호; 문충(文忠) 활동분야; 학문,정치
우리 역사에서 절개의 표본으로 추앙 받는 성삼문과 변절의 대명사로 손가락질 받아왔던 신숙주. 이 둘은 본래 세종의 총애를 나란히 받던 동료였다. 세종이 집현전에 인재들을 모아들 일 때 함께 뽑혀 화려한 세종시대를 함께한 동료였으며,명나라의 문장가가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과 대적할 최고 문장가로 함께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선왕이 부탁한 어린 생금 단종과 힘있는 세조를 두고 이들의 판단은 엇갈린다. 결국 1456년 6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실패한 성삼문이 온몸을 불로 지지는 모진 형벌을 받을 때 신숙주의 자리는 국문하는 세조 옆이었다. 전하는 이야기들은 성삼문이 신숙주를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고 한다.
“네 이놈. 예전에 영릉(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고 산책하시면서 곁에 있던 우리에게 상왕의 후일을 당부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데,네 놈만이 그 일을 잊었단 말이냐?"
그 순간 이들은 어떤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성삼문은 1418년(태종 18)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성삼문이 태어나던 해는 세종이 즉위한 해이기도 하다.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하늘에서부터“낳았느냐?" 하고 묻는 소리를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1435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1438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문과에 합격했다. 이후 집현전 학사로 선발됐다.
신숙주는 성삼문보다 한 해 전인 1417년(태종 17) 태어났다. 같은 헤 수양대군,곧 세조가 태어났다. 1438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해 동시에 생원•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1444년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했다.
세종은 집현전에 인재들을 모아놓고 학문에 열중하게 했다. 학문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많은 편의를 봐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뽑히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집이나 절에서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를 두기도 했는데,성삼문과 신숙주도 박팽년•하위지 등과 함께 북한산에 있는 진관사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함께 했다. 특히 성삼문과 신숙주는 최고의 수재로 인정받아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날 밤,세종이 내시를 시켜 집현전에 숙직하는 학자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했다. 이날 숙직은 신숙주였는데, 책 읽기를 워낙 좋아했던 신숙주는 숙직을 서는 날이면 오히려 책을 맘껏 볼 수 있는 날이라 좋아하며 밤새 책을 읽곤 했다. 내시가 몇 차례나 엿보아도 책을 읽고 있던 신숙주가 닭이 울고 나서야 잠들었다고 하자 세종은 입고 있던 갖옷을 벗아 덮어주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 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된 신숙주가 매우 감격해 했고,이 소문을 들은 다른 학자들은 더욱 분발해 학문에 열중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세종의 최고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도 둘은 많은 기여를 했다. 세종은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성삼문•신숙주•정인지•최항 등에게 훈민정음을 연구하도록 했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마침 명나라의 학자인 황찬이 랴오둥으로 귀양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열세 번이나 왕래한 끝에 음운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도 이 둘을 각별히 대했다. 그러나 신숙주가 1452년(문종2) 수양대군과 함께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여 오면서 이 둘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몇 달 동안 먼 이국 땅을 함께 넘나들며 동갑내기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의기투합했던 듯하다. 수양대군의 적극적인 손짓 때문인지,병에 늘 시달리는 왕 대신 패기만만한 수양대군에게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 신숙주의 판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수양대군에게는 그 시대 대표적인 지성인 신숙주가 필요했고,신숙주는 어린 단종 보다 기개 있고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수양대군에게 끌켰다.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서른아흡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열두 살의 단종이 왕위를 이었다. 수렴청정해줄 왕실 직계 어른도 없어,황보인•김종서에게 권력이 집중됐고,왕실 측근 세력들은 이를 불만스러워 했다 이러한불만의 직접적힌 표출이 계유정난이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받들고 역모를 꾀 한다는 핑계를 대어 김종서•황보인을 포함한 반대파를 제거한 뒤 자신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웠다. 이때 공신록에 오른 인물들은 수양대군을 포함해서 36명이었는데,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던 신숙주는 물론 정변 당일 집현전에서 숙직하며 근무한 공이 있다 하여 성삼문의 이름도 공신에 올랐다. 신숙주에게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제수되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집현전 학사 출신이 공신록에 대거 포함되었는데,그 이유는 이들이 직접 세조에게 협조했다 가보다 자신의 집권을 유교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세조의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주로 성삼문을 지지하는 쪽에서 전해진 이야기들에 따르면,신숙주는 이를 모두 받아들인 반면,성삼문은 세운 공이 없다고 공신록에서 빼줄 것을 자청하는가 하면 당시 공신록에 오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축하연을 열었지만 혼자서만 끝까지 잔치를 열지 않았다. 또한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던 당시 성삼문이 예방승지(禮房承旨)였는데,이때 직무상 예방승지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갖다 바쳐야 했다. 옥새를 품에 안고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던 성삼문이 그만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통곡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날 밤 박팽년이 경회루 못에 빠져 죽으려 하자,성삼문이 뒷날을 도모하자고 말린 뒤 뒷간에 가서 통곡했다고도 한다.
반면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즉위를 수용했고,새 왕은 그를 곧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임명했다. 문사•학자로서 가장 영광된 자리를 준 것이다. 신숙주는 새 왕의 즉위를 중국에 알리는 소임을 맡고 베이징에 가서 맡은 일을 완수하기도 했다. 성삼문을 중심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비밀스럽게 모여 단종의 복위를 의논할 때 신숙주를 끼워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이들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새 왕이 등 극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로부터 사신이 와서 이들을 위한 축하연이 열리는데,마침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임금의 곁에서 호위하는 별운검으로 내정되었다. 별운검은 칼을 차고 있을 수가 있다. 두 사람이 세조와 세자를 처단하는 것을 신호로,일시에 자신이 맡은 공신 세력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은 처음부터 무산되고 말았다. 한명회의 건의에 따라 별운검이 폐지되고,몸이 약한 세자도 연회석상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유응부를 비롯한 무신들은 그 자리에서 한명회를 죽이고 실행하자 했으나,성삼문과 박팽년은 이들을 황급히 말리며 뒷날을 도모하자고 했다. 세자가 없는 마당에 한명회만 죽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그러나 거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자 불안해 진 김질이 장인인 집현전 대제학 정창손에게 밀고하여 이들은 모두 체포되고,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다음 날 세조가 직접 국문에 나섰다.
세조가 성삼문에게 역모를 추궁했다. 성삼문은“신하가 제 임금을 모시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세상이 다 아는 이치를 왜 나리만 반역이라고 하십니까?"라며 되물었다. 세조에게 대군을 가리키는‘나으리’라는 호칭을 사용하자 화가난 세조는 더욱 추궁했 다. “그 동안 나에게 신하로 칭해놓고 이제 와서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니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그 동안 내가 주는 녹을 먹어놓고 이제 와서 모반이 아니라고 잡아떼느냐?"라고 물었다. 이 말에 성삼문은“상왕이 엄연히 계시거늘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는단 말이오? 나는 나으리의 녹을 한 톨도 먹은 적이 없소. 나으리가 준 것은 집에 그대로 쌓아놓았으니 내 집을 뒤져보면 알 것 아니요”라고 대답 했다. 세조는 분노에 몸을 떨며 형리를 시켜 불에 달군 죄로 성삼문의 맨 살을 지질 것을 명했다.
성삼문에 이어 박팽년•유응부•하위지•이개를 국문했지만,모두들 뜻을 굽히지 않자 세조는 모두 능지처참할 것을 명했다. 체포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자결한 유성원을 포함해 이들을 사육신’이라 한다. 이 가운데 특히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도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삼족이 몰살되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다. 그리고 얼마 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도 비운의 죽음을 맞고 만다.
신숙주는 이후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많은 지탄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세조 대에 영의정에까지 오르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선 역대의 사적을 적은 편년체 역사책인《국조보감》을 완성했고,군사제도에 관한 책인《병정》이라는 책을 지었으며,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일본의 지세와 국정,교빙 왕래의 연혁,사신 접대 예절 등을 적은《해동제국기》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한 1459년(세조 7)에는 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올라 여진족을 회유하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경 등 많은 고전들이 그의 손을 거쳐 우리말로 번역되었고,그 간행을 대부분 그가 맡는 등 훈민정음을 발전•보급시켰다는 데 있다. 신숙주 마저 성삼문과 같은 길을 택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세조는 신숙주를‘나의 위징’ 이라고 부르며 아꼈다. 위징은 당 태종의 통치에 헌신적으로 노력한 인물로,세조 자신도 태종처럼 신숙주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 성삼문은 명분을 택했고,신숙주는 목숨을 택했다고 들 하나,이 둘의 선택이 서로 다른 군주 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 하기도 한다. 왕권 강화를 꿈꾸는 세조 밑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점 점 좁아들 것을 염려한 성삼문 등이 나이 어린 단종을 밀며 그 명분으로 유교적 의리와 선왕의 부탁을 내세웠던 반면,신숙주는 나이 어린 단종보다 야망과 힘이 있는 세조가 왕으로서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