いないいない酒場-フランク永井 作詞 阿久悠 作曲 吉田正
一 運の悪い娘が 名前を変えて ひとりカードをきゅている 乾いた花のさびしさを 誰に話せばいいのだろう いるか いないか いるか いないか いない いない酒場(バー)
二 ほんの少しだけ にぎわい見せて あとは女の吐息だけ ほせないグラス 指にして 迷う心を誰にやる いるか いないか いるか いないか いない いない酒場
三 灯り落としたら 二人になって 愛と恋とのかくれんぼ 大人の嘘を承知して 明日のしあわせあるだろか いるか いないか いるか いないか いない いない酒場
フランク永井さん1985年最後に吹き入れた曲です。
秘境 속에 잠든 어린 임금 端宗 寧越에는 朝鮮王朝 第 6代 임금인 端宗이 잠들어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國內 最高 旅行地로 손꼽히고 있지만 목숨이 危殆로웠던 端宗의 눈에는 東江과 西江이 품은 秘境도, 淸泠浦의 秀麗함도 시린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만 같습니다. 現在 觀光客들은 端宗이 流配됐던 淸泠浦와 그가 묻힌 莊陵을 거닐며 그를 記憶하고 있습니다.
寧越 만한 旅行地가 또 있을까요? 中國의 구이린(桂林)이 부럽지 앓은 東江과 西江의秘境 4億年의 神秘를 간직한 高氏洞窟, 朝鮮王朝 悲劇의 主人公 端宗의 이야기가 담긴 淸泠浦와 莊陵,19個에 이르는 博物館, 自然을 고스란히 담은 鄕土飮食 等 旅行地로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작고 조용한 江原道 山골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理由이기도 합니다.
寧越의 漢字 地名은 ‘便安하게 넘어간다’ 程度로 解析됩니다. 寧越 東北部를 두르고 있는 太白山脈을 편안하게 넘어갈 수 있는 고장이란 뜻도 됩니다. 觀光客들은 東海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旅行의 眞面目을 發見하고 머물곤 합니다. 이렇듯 모든 이들이 즐거움을 滿喫하고 지나가는 寧越에 왔다가 떠나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朝鮮王朝 第 6代 임금 端宗이 그 主人公입니다.
端宗이 三寸인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빼앗기고 上王으로 封해져 있던 世祖 2年(1456) 6月 集賢殿 學士 成三問, 朴彭年,河緯地 等은 上王 復位를 圖謀하다 斬刑에 處해집니다. 그리고 이듬해 6月 端宗은 上王에서 魯山君으로 降封되고, 다음날 寧越 淸泠浦로 流配되었습니다.
淸泠浦는 陸地와 이어진 곳이 가파른 벼랑이고, 淸泠浦를 휘감은 西江은 幅이 좁지만 水深이 깊어 배가 아니면 건널 수 없는 天惠의 監獄이었습니다. 端宗은 이곳에서 2個月 남짓 起居하며 悲痛한 歲月을 보냈습니다.
조그만 遊覽船에 올라 장대 하나로 건널 수 있을 듯한 草綠빛의 시린 江을 건넜습니다. 배에 오른 不過 몇 分도 되지 않아 遊覽船은 淸泠浦 쪽 船着場에 닿았습니다. 동골동글한 돌이 깔린 자갈밭 뒤로 푸르게 우거진 숲이 視野를 채웁니다.
소나무 숲 옆의 낮은 담장 안으로는 承政院日記의 記錄에 따라 깨끗하게 復元된 기와집과 宮女와 官奴들이 起居했던 草家의 行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端宗이 洪水로 因해 寧越 東軒의 客舍로 옮길 때까지 2個月 남짓 生活했던 곳입니다. 內部는 家具와 이불, 서안 등으로 채워져 있고,까만 갓을 쓰고 푸른 道袍를 입은 端宗과 그에게 절을 하는 선비 官奴 等의 人形이 있습니다. 特異한 것은 周邊을 감싼 소나무들이 모두 端宗 御所를 向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는 事實입니다. 소나무 한 그루 는 아예 담을 넘어 마당 한가운데까지 가지를 뻗고 있습니다.
소나무 숲 가운데에는 端宗이 걸터앉아 休息을 取하곤 했다는 樹齡 600余 年의 늙은 소나무인 ‘觀音松’이 있습니다. 端宗의 流配 生活을 지켜보며 端宗의 絶叫와 슬픔을 들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소나무 숲 뒤쪽으로 散策路를 따라가면 絶壁 위쪽에는 端宗이 漢陽에 두고 온 王妃 宋氏를 생각하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望鄕塔과 每日 올라 漢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魯山臺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望鄕塔과 魯山臺의 가파른 벼랑 아래로는 草綠빛 江물이 悠悠히 흐르고 있습니다.
돌아 나오는 길,船着場에서 江 건너를 바라보니 작은 碑가 보였습니다. 碑에는 禁府都事 王邦衍이 端宗에게 賜藥을 進御하고 漢陽으로 돌아가는 길에 悲痛한 心情으로 옮은 時調가 새겨져 있습니다.
‘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발길 예놋다’
淸泠浦로 流配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世祖의 同生이자 魯山君의 叔父인 錦城大君이 다시 復位를 圖謀하다 發覺돼 賜死됐습니다. 魯山君은 다시 降等되어 庶人이 됐고, 結局 1457年 10月 24日 寧越에서 죽었습니다. 端宗의 나이 17歲였습니다. 屍身은 東江에 버려졌으나 當時 寧越 戶長으로 있던 嚴興道는 屍身을 收拾한 後 葬禮를 치렀습니다.
寧越邑內에서 北西쪽에 位置한 莊陵은 端宗의 陵입니다. 다른 朝鮮王陵들과 함께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돼 있습니다. 이곳에는 端宗을 爲해 목숨을 바친 忠臣位 32位, 朝使位 186人 等의 位牌를 모신 藏版屋과 王陵에 祭香을 지내던 寒食 무렵이면 물이 넘치도록 솟아 올랐다는 샘물인 靈泉, 嚴興道의 忠節을 기리는 旌閭閣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端宗歷史館에서는 端宗의 生涯를 子細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端宗의 時代,昇遐,復權 等 세 部分으로 區分돼 있어, 世子 卽位부터 端宗大王으로 復權되기까지의 事實을 알 수 있습니다. 地下에는 端宗과 正妃였던 定順王后에 對한 史料들이 展示돼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