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한글날 노래-국립합창단///周時經

bsk5865 2015. 3. 28. 08:19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3.28 06:12

 

한글날 노래-국립합창단///周時經(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014 



한글날 노래-국립합창단

한글날 노래-국립합창단

작사 최현배 작곡 박태현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 넉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세계의 글자 중에 으뜸 이도다
한글은 우리 자랑 민주의 근본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한 겨레 한 맘으로 한데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바른 길 환한 길로 달려나가자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 나라에
한글은 우리 자랑 생활의 무기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周時經

생몰년도: 1876년(고종 13)-1914년
호; 한힌샘 백천(白泉)
활동분야; 국어학
다른 이름; 주상호(周相鎬)

생애와 업적

‘내가 배우려는 것은 결국 한문으로 씌어진 문장의 의미와 그 교훈이 아닌가? 서당에서 스승이 한-문의 의미를 해석할 때는 반드시 우리말로 되새기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어려운 한문을 쓰지 말고 누구나 잘 아는 우리말로 가르치면 쉽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내가10년 동안 공부하여 얻은 지식을 만약 우리말로 배웠다면 대략 3. 4년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니,그보다 더 일찍 배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우리말이 있고 그 말을 적을 수 있는 훈민정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옛 선비들은 한문만을 문자와 학문이라고 여기고 훈민정음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는 결코 옳지 못한 일이다 그토록 어렵게 배우는 한자에 비한다면 훈민정음은 얼마나 알기 쉬우며,아름다운 문자인가!"

아직 소년 티를 벗어나지 못한 열일곱 살의 주시경은 이러한 깨달음 아래 한문 공부를 그만두고 새로운 학문의 길을 모색했다.

어린 시절 영양실조에 걸려 자주 기절했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지만,매우 명민하고 고운 심성을 가졌던 그는 열세 살 때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한양으로 올라왔다. 큰댁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에 한양에 올라와 서당에 다니며 글을 익혔다.

새로운 학문을 찾던 주시경은 당시 선진적인 학자로 일컬어진 박세양• 정인덕 두 스승 밑에서 산수 •지리 •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는 옥계(박세양의 호),회천(정인덕의 호) 선생 밑에서 수업을 시작한 뒤 각 문명 부강국이 모두자국의 문장을 가지고 막대한 편의를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연구하여 국어 문법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당시는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에 걸쳐 일어나고,청일전쟁 • 갑오개혁 등 나라가 큰 파도에 일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시세에 민감하고 혈기왕성한 열아홉의 주시경은 농민들이 궐기했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두메산골인 그의 고향은 조용하기만 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투를 잘라 신식 머리를 한 다음 신학문을 가르치는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잡역으로 일하며 틈틈이 학교 수업을 받고,밤늦게까지 등잔 밑에서 우리글을 연구했다. 영어 공부를 통해 배운 알파뱃 발음과 철자법 문법 구조 등의 이론을 훈민정음에 응용해나갔다.

그 무렵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서재필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주시경은 그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1896년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할 때 회계 겸 교정 담당이 되어 참여했다. 순 한글로 발간된 이 신문의 교정을 맡았다는 것은 당시 이미 그가 한글 실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교정뿐만 아니라 기사 정리,기사 작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 해 민주적인 입헌 정치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결집하여 ‘협성회(協成會)’ 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여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협성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학생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다방면의 학문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의욕은 대단했다. 배재학당의 만국지지과를 졸업한 뒤에 다시 배제학당의 보통과에 입학했으며,인천의 이운학교(利運學敎)에 가서 잠시 항해술을 배우기도 하고,서울의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측량술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이화학당의 영국인 의사한테 영어와 의학을 배웠고,외국어학교에서 일본어와 중국어 강의를 들었으며,기계학 • 종교학을 독학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시경의 연구 중심에는 언제나 국어학이 있었다. 또한 그는 학문 연구와 민중계몽운동이 서로 다른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민중을 깨우기 위해 그들에게 지식을 향한 문호를 열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국어를 정리하고 국어교육에 온 힘을 기울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점점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명성은 높아졌다. 서울 각지에서 ‘국어강습회’ 가 열리기 시작했고,근대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마다 잇달아 국어 강의를 요청했다. 주시경은 그러한 요청을 최대한 받아들여 초인적인 정열로 강의를 해나갔다. 당시 그는 청년학원 • 공옥학원 • 서우 • 이화 • 명신 • 흥화 • 기호 • 숙명 •진명 •휘문•보성 •중앙•융희 •배재 •서북 • 협성 • 경신 • 영창 • 사범강습소 • 외국인연구소 등 무려 20곳에서 강의했다. 국어뿐만 아니라 지리 • 역사 • 수학을 가르치기도 하여,박학다재한 선생님으로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강의를 많이 하긴 했지만 당시의 학교는 대부분 경영이 어려워 보수가 매우 적었다. 주시경은 항상 가난했다. 언제나 무명옷에 짚신을 신고 굶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연구에 열중한 그는 어려운 살림에서도 돈을 구하여 많은 책을 샀다. 그 책들을 커다란 책 보따리에 싸 들고 돌아다니곤 했기 때문에, ‘주보따리’ ‘주보퉁이’ 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던 주시경에게 감동한 어느 유지가 집을 한채 사주어,여기저기 비가 새는 초가집을 면하게 되자,주시경은 좋은 집이 생겼다는 것보다 힘들게 모은 귀중한 책들을 안심하고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생겨서 좋아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연구와 강의를 하는 한편 주시경은 정부의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개설할 것을 건의하고,국어를 시대에 맞게 개혁할 것을 호소했다. 그의 제안이 수용되어 1907년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지석영 • 이능화 등과 함께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참여한 주시경은 국어학사와 훈민정음의 역사,한글 문자의 철자와 발음,문법 등에 관한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했지만,일제의 방해로 성과를 공표하지도 못한 채 연구소는 해산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시경은 국문연구소의 연구 과제를 정리한《국어문전음학》을 발간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9년 국한문혼용 체였던 위의 책을 순 한글로 정려한 《국어문법》을 발간했다 《국어문법》은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문 법서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평가 받는다.

1910년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주시경은 동포들에게 자주독립 정신을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민족의 대표적 문헌을 발간하여 널리 보급하는 운동에 나서는 한편,《국어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또한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을 분발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안남망국사 安南亡國史》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일제는 즉시 발매 금지했지만,이 책은 은밀히 판매되어 독립운동가의 필독서가 되었다. 1914년 《말소리》라는 문법서를 발간한 뒤 한글말살정책을 펼치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연해주와 중국 동북 지방의 독립운동가들과 행동을 함께할 결의를 하고 망명을 준비하던 중,갑자기 병상에 누워 서른 아흡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평 가

주시경이 이루어낸 국어 연구의 과학적 성과는 “불멸의 금자탑” 으로 평가된다. 주시경의 소리 분석,낱말 분류는 한글의 문법 및 분석에 과학적 토대가 되었다. 후세 학자들은 그의 공적에 대해 첫째,국어의 음운론에서 독창적인 이론적 토대를 쌓은 일,둘째, 국어 문법 체계 연구에서 주체성 있는 새로운 길을 연일, 셋째,철자법 연구에서 훈민정음의 초성 • 종성 등 규칙을 적용하여 오늘날의 형태와 원칙을 확립한 일,넷째, 한자시용을 폐지하고 일반용어뿐만 아니라 학술용어에서도 고유한 우리말을 사용하여 모범을 보인일,다섯째,종래의 음절식 문자를 없애고 문자를 풀어 가로쓰기 할 것을 주장하고 직접 그 실천적 모범을 보인 일”이라고 요약한다.

한편, 주시경은 교육자로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국어학자 이병기는 “선생의 말씀에는 선생의 성격과 행동이 잘 나타나고 있었다 참으로 선생은 인격으로 보더라도 당시 제일인자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라며 스승을 기억했다. 스승의 삶을 인생의 거울로 삼았던 그의 제자들은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기둥 역할을 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