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나는 울었네-손인호///羅喆

bsk5865 2015. 3. 27. 08:27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3.27 06:35

 

나는 울었네-손인호///羅喆(D)|★....演歌 게시판

黃圭源  http://cafe.daum.net/enkamom/KTiH/7009 


기다리겠어요-남인수


기다리겠어요-남인수

작사 손로원 작곡 박시춘


기다리겠어요 불 꺼진 삘딩 앞에 언제나
외로이 홀로 나 혼자 홀로
남 모르게 흘러 젖는 눈물을 씻으면서
달빛을 안고 별빛을 안고
바람을 가슴에다 안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대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낯설은 지붕 밑에서 기다리겠어요


기다리겠어요 내 마음 빈틈없이 언제나
그대를 찾는 그대를 찾는
카나리아 울적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사진을 보고 얼굴을 보고
그리운 눈동자를 보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대가 웃고 오는 그날까지
꽃다발 손에 들고서 기다리겠어요


羅喆


생몰년도 : 1863년(철종 14)-1916년
호; 홍암(弘嚴)
활동 분야; 종교,독립운동
다른 이를; 나인영(羅寅永)

생애와 업적

“최근 신문 보도에 의하면,러일전쟁이 끝나면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소문인데,이런 엉뚱한 이야기는 절대 일황(日皇)의 본의가 아닌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지난 1904년 청일전쟁 때 폐하께서는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인데 청나라가 마치 속국인 것처럼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므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다’ 고 하였습니다. 금번 러일전쟁에 있어서도 한국의 안전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싸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두 전쟁을 정의의 전쟁. 즉 의전(義戰)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속담에 ‘여항의 필부도 거짓말을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히물의 한 나라의 군주가 거짓말을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을사조약 전 나인영 (나철이 대종교를 창시하기 전 이름)이 일본 국왕에게 보낸 글이다. 나인영은 일본의 국왕으로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고, “우리 한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한국만의 행복이 아니요 귀국의 행복이며 세상모두의 다행”이라 했다.

나인영은 또한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특파된다는 보도를 보고 그에게 ‘겉으로 한국을 유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내 섬으로는 한국을 집어삼키려는 꾀를 품고” 있다고 강력히 항의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일본 국왕이나 이토 히로부미는 나인영의 충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개인의 입장어1펴 일본 국왕과 이토 히로부미 에게 글을 보내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는 발상 자체가 지금의 상식으로 봤을 때 순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시도는 헤이그 특사 사건보다도 앞서 시도된 외교적인 독립운동이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후 의열 투쟁,정신문화운동,그리고 자결순국까지 모든 방법을 다 써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가히 독립운동의 선각자요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스물아홉 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해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 등을 역임하며 출셋길을 걷던 나인영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징세서장에 임명되자 백성을 착취할 수 없다며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구국운동을 펼쳤다.

러 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노골적으로 한국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나인영의 과감하고 기상천외한 외교 활동은 시작된다. 그가 생각할 때 이것은 분명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겉으로 표방했던 공약과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한국에 대한배신이었다.

나인영은 러 • 일 간의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그대로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이 그의 미국 행을 허용할 리 없었다. 미국 행에 실패한 나인영은 동지 이기 •오기호 등과함께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 정부와 정계요로(要路)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이루자는 요구서를 전달했다. 이 글은 현재 전하지 않지만,한말의 학자 정교가 펴낸《대한계년사》에서는 이 글이 근엄하고 명쾌해 각 신문에 게재됨으로써 한국에 인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일본 대신들도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했고,일본에 체류하고 잇던 나인영은 그 소식을 듣자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 1월 한성에 도착했다. 이날 한성의 서대문 역에 도착해 힘없이 걸어가는 그의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나《삼일신고》와 《신사기》 두 권의 책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생각은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을사 5적을 처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독립 외교를 펼쳤지만,그것으론 뜻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말로 안 되면 칼로 해야겠다는 결단에 이르렀다. 그는 “국권의 회복은 백 가지 계책을 다 썼다. 돌이켜보건대 오늘의 이 나라 꼴을 보게 한 자는 현 정부 대신들이다. 그러므로 국민을 대신하여 이들을 주살하고 새로운 자주독립 정부를 조직하여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먼저 자신회(自新會)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조달한 뒤 18명의 결사대원을 모았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처음에는 5적(五戰)의 집에 폭발물을 배달해 폭살시키려 했으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총으로 쏘아 죽이기로 했다고 전한다.

거사 일은 1907년 3월 25일 오전 10시,대상은 박제순 • 이지용 • 권중현 • 이완용 • 이근택의 을사5적에 학부대신 이재극을 추가해 을사6적을 처단하기로 했다. 6적들이 궁궐에 들어가는 날에 맞춰 각 세 명의 결사대원이 담당한 역적의 집 앞에 숨어 있다가 하나하나 처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기일이 촉박했던 탓에 대원들의 연습이 부족해 명중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대원 모두가 체포됐고 오기호 • 김동식 • 이기 등이 자수한 뒤,나인영도 자수했다. 공판정에서 10년 유형이 결정되었으나,그 해 말 고종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을사 5적 처단 의거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거의 효시가 된다. 결사 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훈은 이후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참여해 미 의원단 방한 시 조선 총독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석방된 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한 나인영은 오기호가 주장하는 대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 외교를 펼치려 했다. 그 무렵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앉힌 뒤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군대마저 해산해버렸다. 이러한 때 일본에 가서 외교 담판을 짓겠다는 그의 생각은 여전히 순진하고도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일본에서 그는 다시 한 노인을 만나 《단군교포명서》. 《고본신가집》. 《입교절차서》라는 책을 받는다. 그 노인은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어찌 이 바쁜 때에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시오 하루 속히 귀국하여 단군 대황조의 교화를 펴시오. 이 한마디 부탁뿐이니 곧 떠나시오”라고 말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말에 나인영은 극적인 순간을 맞는다.

“국운의 회복은 어느 애국정객 몇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 민족이 거족적으로 일치단결하여 생명의 근본인 단군 대황조를 지성으로 숭봉하고 그 교화의 대은 아래 신화의 대력을 얻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 깨달음으로 나인영은 나철로 다시 태어난다. 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이 사대주의 역사교육에 있었음을 깨닫고 “비록 나라는 망하였으나 이 민족만은 살아서 진실한 민족의식을 되찾고 민족의 중흥과 국가의 재건에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이후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된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삼일신고) 등의 경서를 탐독한 뒤 1909년 1월 15일 12시 마침내 단군교를 중광했다. 나철은 단군교를 통해 안으로 우리 민족의 단합을 과시하고 밖으로는 침략자 일제를 교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1년 뒤 ‘단군’ 이라는 말에 민감한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지만,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대종교를 불법화시켰다. 일제는 대종교를 “국조 단군을 숭봉하는 교단으로서 민족의식을 환기시키고 일제에 반발하여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일본에 적개심을 일으키는 종교요,민족적 혈통을 고수하여 국권 회복의 선봉 기수가 될 위험이 있는 단체”로 인식했다. 그래서 대종교를 해체,폐교하는 것을 본 방침으로 정했다.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된 1916년 8월 나철은 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로 향했다. 삼성사는 단군이 어천(御天)한 곳으로 알려진 성전으로,환인 • 환웅 • 단군의 삼신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었다. 8월 14일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3일 뒤 제자들이 문을 열어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마흔아홉의 나이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그는 유서를 남겨 대종교 탄압에 슬퍼하고 항의했다.

유서 가운데에는 일본 총리와 조선 총독에게 남긴 글도 있었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대종교 탄압은 광복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인에게 단군은 민족정신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단군말살정책은 일제가 자행한 한국사 왜곡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나철과 그가 부활시킨 대종교,그리고 그 신도들은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일을 해냈다. 3 •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산리대첩 모두 대종교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신채호 • 박은식 • 정인보 • 신규식•주시경 • 김두봉 • 최현배 • 이시영 • 이범석 • 이동녕 • 김좌진 • 홍범도 • 나운규 • 이상설 • 홍명희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항일운동가들의 이름이 2002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대종교와 한국독립운동특별기획전에서 ‘대종교를 빛낸 인물’ 로 소개되었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해 이범석(국무총리) . 안호상(문교부장관) . 명제세(심계원장) . 정인보(감찰위원장) . 신성모(국방부장관) 등 6명의 대종교인을 건국내각에 참여시켰다는 시질은 독립운동에서 대종교가 차지했던 역할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집권 후 이승만은 대종교와 임정 세력을 제거해나갔고,이후 서구문화의 팽창으로 민족의 고유사상이 침식당하면서 대종교의 교세는 크게 약화되었다.


평 가

반세기 동안 대종교의 창시자로만 알려져 있던 나철에 대한 재 조명 작업이 근래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004년 7월 나철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열려 “우리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반세기 한국 독립운동사를 가능하게 한 정신적 지도자였다”고 그를 평가했으며,작가 조정래는 나철의 생애를 다룬 소설《신시의 꿈》 추천사에서 “일제 식민지시대에 민족적 인물들이 많이 탄생했지만 그에서도 가장 걸출한 한 사람,그가 바로 나철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그를 홀대해왔다” 고했다.

나철이 홀대 당하고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이유는 당시 대종교가 단군을 구심점으로 하여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는 종교라 일제가 철저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대종교가 점차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자 일제는 나철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시키고 외면했다. 광복 이후에도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나철에 대한 평가는 외면당하다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독립 투쟁의 정신적 지주”라는 명예를 회복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이라는 책을 쓴 역사학자 박성수는 “근 현대 100년 동안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크고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이라면 저는 나철을 첫 번째로 꼽겠습니다”라는 말로 우리 역사에서 나철이 갖는 의미를 강조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호소하여 한국의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한 활동을 말한다.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40여 개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회의였는데,사실상 열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였다. 이 회의에 이준 • 이상설 • 이위종을 파견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과 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하려 했으나,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이해관계를 상호 조정하는 국제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고종 폐위의 계기가 되었다.


한일 신 협약

정미7조약이라고도 한다. 헤이그 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 관리임명권 •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 안을 제시,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 • 조인했다. 조약의 내용은 ① 한국 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② 한국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③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④ 한국고등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⑤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쓸 것,⑤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하지 말 것,⑦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 • 일 • 외국인 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등이다. 또, 일제는 조약의 후속 조치로 행정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국인 대신 밑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고,경찰권을 위임하도록 했으며,경비를 절약한다는 이유로 한국 군대를 해산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