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2500 독립군가///洪範圖와 金佐鎭

bsk5865 2015. 3. 29. 08:10

보낸사람 : 김경동 15.03.29 07:26

 

2500 독립군가///洪範圖와 金佐鎭(D)|★....演歌 게시판

黃圭源 | 조회 43 |추천 0 |2015.03.29. 06:07 http://cafe.daum.net/enkamom/KTiH/7020 


독립군가


독립군가




신 대 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낼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독한 원수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보세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싸우러 나가세 싸우러 나가세 싸우러 나가세


洪範圖와 金佐鎭


洪範圖

생몰년도: 1868년(고종 5)-1943년
활동분야: 독립운동
다른 이름; 범도(範道)


金佐鎭

생몰년도: 1889년(고종 26)-1930년
자; 명여(明女)
호;백야(白冶)
활동분야; 독립운동

1920년 10월 7일 일제는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여 명의 병력으로 간도를 침입,대규모 독립군 섬멸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이중 5,000여 명의 병력이 대한독립군이 있는 지역과 북로군정서가 주둔한 지역에 진격해 들어왔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그리고 국민회의 국민군 등의 연합독립군은 이미 정보를 입수한 뒤 울창한 밀림지대가 있는 청산리에서 적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21일 아침 김좌진‘장군의 사격을 신호로 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를 기록한 청산리전투가 시작되었다. 26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연대장 1명 ,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했고,200여 명을 부상시켰으며,많은 전리품을 빼앗았다.

그 해 6월,봉오동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사망 157명,중경상 300여 명에 이르는 참패를 당한 일본이 엄청난 병력을 투입해 독립군 섬멸작전을 펴려다 다시 청산리에서 연합독립군에게 당한 것이다.

청산리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때론 단독으로,그리고 때로는 연합작전으로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남한에서 청산리 전투하면 김좌진을 떠올리는 게 상식인 데 반해,러시아와 중국에서는 청산리전투를 이끈 공을 홍범도에게 돌리며 특히 소련의 한인들에게 홍범도는 정신적 지주로 추앙 받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청산리대첩 후 두 사람이 걸었던 길에서 찾을 수 있다.

청산리대첩 뒤 일본군은 간도지역의 우리 동포3.000명(1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을 살상하는‘경신대학살(庚申大虐殺)’을 자행했고,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였다. 의식주와 무기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독립군들은 한인독립운동에 동정적이었던 소련 정부와“군수•무기•탄약을 무료로 충분하게”공급해주겠다는 협약을 맺고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다. 이때 홍범도는 러시아로 간 반면,반공주의자였던 김좌진은 발길을 돌려 만주로 돌아갔다.

홍범도와 김좌진은 그 출생과 성장 과정이 많이 달랐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앓고 아흡 살 때 아버지마저 잃어 고아로 자랐다. 열다섯 살 때까지 머슴살이를 했으며,1883년부터 1887년까지 보병부대에서 나팔수로 있다가 군관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 학대를 보다 못해 한 사람을 구타하고 탈영했다. 이후 1890년까지 황해도 수안 부근의 종이공장에서 일했는데,이때에도 임금문제로 사주와 싸운 다음 금강산에 있는 신계사로 들어가 1892년까지 신계사에 머물며 글씨를 익히고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소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해,유인석의 의병과 연합해 싸우기도 했다. 을미의병해산 뒤에는 체포를 피해 돌아다니다 북청에서 산포수 생활을 했다.그러다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일제는 한반도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기 위해‘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법령을 만들어 항쟁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홍범도는 이를 거부하고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1907년 11월 15일 북청 후치령에서 70여 명의 산 포수들을 이끌고 항일의병 전에 나설 것을 선언한 뒤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해산군인,화전민 등 의병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1,000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가 되었고,삼수•갑산•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연전연승을 거두어 명성을 더해갔다. 국내에서의 항쟁에 한계를 느낀 홍범도는 지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뒤 동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 대한국민 회를 결성하자 그 예하의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홍범도는 부하들을 이끌고 밀산을 거쳐 러시아 이만으로 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외에도 북로군정서•국민회군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독립군들이 이곳에 집결했다. 이곳에 모인 독립군들은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는데,이때 서일이 총재에,홍범도가 부총재에 선임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북으로 이동해 자유시로 갔다. 그러나 그 해 한국무장독립투쟁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참변이 발생해 대한독립군단의 항일 전 재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홍범도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독립군 집단 이주정책에 따라 이르쿠츠크로 이송되어 이후 민족해방유격대 원로로서의 예우만 받게 된다.

그 뒤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했고,고려중앙정청을 조직해 한인 사회의 자치활동에 참가하기도 했지만,1937년 부하들과 함께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이주해 크즐오르다 극장의 수위를 맡아보기도 하고, 만년은 집단농장에서 보내다 1943년 일흔다섯 살에 그곳 공동묘지에 묻혔다.

반면 김좌진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지만,부유한 명문 양 반가출신이었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 시키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한 뒤 1905년 한양으로 돌아와서 호명학교를 세우고 대한협회 지부를 조직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기호홍학회에 참여하는 한편《한성순보》이사를 역임하고 안창호 등과 서북학회를 조직했다. 1911년에는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16년 광복단에 가담했으며,1918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이듬해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에 가담했고,정의단이 군정부로 개편되자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군정부 가 북로군정서로 개칭했을 때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편성에 주력했다.

청산리전투 뒤 김좌진도 북쪽으로 이동해 대한독립군단에 참가하고 부총재로 취임했다. 그러나 대한독립군단이 일본군의 보복작전을 피해 러시아 자유 시로 집결할 때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좌진은 발길을 남쪽으로 돌린다 북간도로 되돌아온 그는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어 활동했으며,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 교장으로 정예사관 양성에 힘썼다.

이 무렵 임시정부가 김좌진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며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30년 1월 24일 자택에서 200미터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자유시참변

1921년 러시아 자유 시에서 독립군이 러시아 적군에게 무장해제당한 사건을 말한다. 러시아 영내로 이동한 독립군은 적군(소련군)과 백군(반 혁명군)의 내전에서 적군을 도왔다.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승리한 적군이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산하려 하자 이에 저항하던 독립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