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人物函

朝鮮 最大의 危機로부터 나라를 구한 西涯 柳成龍

bsk5865 2015. 4. 19. 08:18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19 07:19

 

조선 최대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한 서애 류성용|★....일반 게시판

山川 |  http://cafe.daum.net/enkamom/KWfw/29410 

[최기영의 세상이야기]190.朝鮮 最大의 危機로부터 나라를 구한 西涯 柳成龍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안동 하회마을은 물이 돌아나간다는 의미의 ‘물동이동’이라는 순우리말과 ‘河 물 하’자에 ‘回 돌아올 회’자를 써서 ‘하회(河回)’라는 한자 이름을 함께 가진다. 유구한 세월동안 영남지방의 젖줄이던 낙동강 물줄기가 S자 모양으로 마을을 휘감아 도는 하회마을은 한마디로 평화로움과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풍수지리에서는 산과 물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형상을 이상적인 길지로 본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 길지는 흔하지 않은데, 특히 마을의 입지로는 더욱 희귀한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이 바로 풍수지리적으로 산태극수태극의 형상을 가진 희귀한 지형이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청담(淸潭)이중환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擇里志)》〈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천하제일의 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릇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는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 대개 시냇가에 사는 것도 고개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평시나 난시 모두 오래 살 만한 곳이다. 시냇가에 살기에 좋은 곳으로는 영남의 도산(陶山)과 하회(河回)를 제일로 친다.”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하회마을은 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명당임이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600년의 긴 세월동안 풍산평야의 기름진 땅을 기반으로 삼았던 풍산류씨(豊山柳氏)의 동족마을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과거 방산기업으로 너무나 유명했던 풍산그룹이 전폭적으로 후원하여 요즘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역사드라마 징비록의 주인공인 류성룡 대감이 대표적인 풍산류씨이다.

방촌 황희ㆍ고불 맹사성ㆍ오리 이원익 등과 함께 조선조 5대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서애(西厓)류성룡은 김성일과 퇴계의 문하에서 수제자로 주자의 사상을 동문수학하였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후 교리ㆍ응교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ㆍ도승지ㆍ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를 겸직하였고, 이후 1588년 ‘조선시대 벼슬의 꽃’이자 영의정도 부러워할 정도의 벼슬자리로, “3대가 선(善)을 베풀어야만 대제학 한 명을 배출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양반 문벌가문을 결정하는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벼슬인 ‘대제학’이 되었다.

흔히들 조선의 양대 문벌을 말할 때 ‘연리광김’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연안 이 씨’와 ‘광산 김 씨’(전주 이 씨는 왕실이라서 제외)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대제학 7명씩 배출하여 수위를 차지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왕손인 전주 이 씨에서도 조선왕조를 통틀어 873명의 문과급제자 중 단 7명만이 대제학이 될 정도로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든 관직이었다. 이처럼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이라는 직책은 학문을 하는 모든 선비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류성룡은 1592년 4월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ㆍ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ㆍ경상 ㆍ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제조ㆍ성곽수축 등 군비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잘 둘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서애는 우산에 구멍을 뚫어 선조를 훈수함으로써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선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빼어난 충신이었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편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높다란 절벽이 보이는데, 그 절벽이 바로 ‘부용대(芙蓉臺)’다. 부용대는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에 해당하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면 하회마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부용대라는 이름은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마을에서 부용대를 바라보고 절벽 왼쪽에는 류성용의 형인 겸암(謙庵)류운룡의 겸암정사(謙唵精舍)가, 오른쪽에는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자리 잡고 있다. 겸암정사는 겸암 선생이 건립해 학문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던 장소이며, 옥연정사는 선조 19년(1586)에 서애 선생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 향리로 은퇴한 서애 선생이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지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선생은 당초 이 정자를 짓고자 했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탄흔’이란 승려가 10여 년 동안 곡식과 포목을 시주해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용대 절벽 중간에는 옥연정사와 겸암정사를 잇는 좁다란 길이 있다. 일명 ‘층길’이다. 층길은 ‘형제의 길’이라 할 만하다. 옥연정사에 기거하던 서애 선생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바로 겸암정사에 머물던 형, 겸암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겸암정사 앞에는 ‘겸암사’라는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내 형님 정자 지어 겸암이라 이름 지었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었구나.
발끝엔 향기로운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 내며 밤새 흐르네.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은 소문난 효자이자 이인(異人)으로 회자되는 인물이다. 겸암은 퇴계가 향리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고 하는데, 퇴계 또한 그의 학문적 자질과 성실함에 감복하여 총애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부용대 남쪽 기슭에 정사를 지어 학문에 정진할 때 ‘겸암정사(謙巖精舍)’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퇴계였다.

겸암은 그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겸암정사에 묻혀 학문에 심취해 있던 겸암은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랏일을 보게 되어 전함사별좌로 임명되었다. 그 후 의금부도사와 한성판관, 원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부모를 모시기 위해 몇 차례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인동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겸암이 사복시첨정(司僕侍僉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터지자 당시 좌의정이었던 아우 서애는 임금을 모시고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겸암은 왜란이 터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팔순 노모를 업은 채 식솔들을 거느리고 왜적 떼와 도둑을 피해 밤낮으로 오솔길을 더듬어 고향 하회에 돌아와서 노모를 모셨는데, 당시 서애가 선조에게 형인 겸암을 관직으로부터 해직시켜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읍소하여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겸암은 뒤에 풍기군수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이 있을 때에도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데 힘썼으며, 57세 되는 해 가을 원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노모를 위하여 사직하고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서애는 전투에 필요한 평양지도를 준비하여 이여송의 4만군대가 전투에 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을 무찌르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이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서애의 선견지명에 크게 놀라며 조선에 이런 우수한 인재가 있다며 탄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서애가 소맷자락에서 꺼냈다는 평양지도를, 사실은 형인 겸암이 미리 서애에게 준비해서 주었다는 것이다. 즉, 겸암은 지도가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서애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챈 일본 측에서 서애를 죽일 요량으로 자객을 보냈는데, 겸암이 그것을 미리 알고 동생 서애에게, “오늘 중 한 명이 와서 재워 달라고 할 것이니, 그 중을 내 집으로 보내게.”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중이 서애의 집을 찾아와 하룻밤 재워 줄 것을 청했고, 서애는 건너편 형님 집으로 그 중을 보냈다. 한밤중에 겸암은 집에서 잠든 중을 깨워 일본에서 보낸 자객임을 확인했고, 중으로 변장한 일본 자객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겸암의 선견지명에 놀라서 꽁무니가 빠지도록 내뺐다고 한다.

이렇듯 서애는 임진왜란 중에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이야기되지만, 겸암은 범상치 않은 이인으로 회자되고 있다. 비록 겸암이 동생 서애처럼 높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맏이로서 부모를 정성스레 봉양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은 충분히 이인으로 추앙받을 만하다.

서애가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저술한 《징비록(懲毖錄)》의 내용을 보면,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아! 임란의 전화는 참혹하였다. 수십 일 동안에 삼도(三都). 즉, 서울ㆍ평양ㆍ개성을 지키지 못하고 팔도가 산산이 깨어졌으며, 임금께서 피란하셨다. 그리고서도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 …… ‘내 지난 일을 징계(懲)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毖)하노라’고 했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저작한 까닭이다. …… 이에 한가로운 틈을 타서 내 이목으로 겪은 임진년(1592년)으로부터 무술년(1598년)에 이르기까지 일을 대략 기술하니, …… 비록 보잘것없지만 모두 그 당시의 사적이므로 버리지 않고 두어서, 이것으로 내가 전원에 있으면서도 성심으로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고 또한 어리석은 나의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나타내는 것이다.”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임진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긴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징비(懲毖)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서애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서책과 주변을 정리한 뒤에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에서 베푸는 장례를 사양할 것이며, 신도비(神道碑) 등을 세우기 위해 남에게 비명(碑銘) 등을 청탁하지 말 것이며, 묘소를 치장하지 말도록 하라.”

평소에 자손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충효를 행할 것을 권면하며 자신이 평생을 부끄러운 일이 많았던 것이 한스럽다며 자신을 낮추고 자손들에게는 충과 효를 강조하라는 뜻에서 다음의 시를 한 수 남겼다고 한다.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 / 林間一鳥啼不息(임간일조제불식)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 門外丁丁聞伐木(문외정정문벌목)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 一氣聚散亦偶然(일기취산역우연)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 只恨平生多愧怍(지한평생다괴작)
권하노니 자손들은 반드시 삼갈지니 / 勉爾子孫須愼旃(면이자손수신전)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 / 忠孝之外無事業(충효지외무사업)


서애는 만년에 “나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 둘째는 벼슬이 지나치게 높았으나 속히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한 것, 셋째는 도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다. 이에 서애가 죽은 후 그의 후손과 문하생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는 위하여 ‘충효당(忠孝堂)’이라는 종가를 지었다. 당호를 충효당이라 한 이유는 류성룡이 평소에 자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자주 하였기에 그를 받들어 이름 지은 것이라 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이곳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만일 류성룡과 같은 충신이 이 나라에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을 것인가? 이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이런 아름다운 역사를 뒷전으로 미루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늘 부족하고 고루(固陋)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름 소신껏 우리의 찬란한 역사와 관련된 칼럼을 기고하려고 노력하는 바이다.


 ∼글 주신분; 한림(漢林)최기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