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 월간초 작곡 하기송
一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굿은 비 내리는 이 밤이 애절 구려 능수버들 채질하는 창살에 기대여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二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애절 구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興宣大院君 생몰년도: 1820년(순조 20)-1898년(광무 2)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波) 활동분야: 정치 다른 이름: 이하응(李昰應)/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생애와 업적 철종이 오랜 병고 끝에 1863년 세상을 떠났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 열아홉 살에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된 철종은 안동 김씨 세력의 허수아비 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추대 당시 안동 김씨의 세도는 왕족 기운데 똑똑해 보이는 인물은 제거하고 만만한 인물인 철종을 골라 왕으로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방심했던 것일까. 철종 사후 미처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궁궐의 최고 어른이었던 조 대비는 옥새를 쥐고 중신들을 소집시킨 뒤“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으로 하여금 익종 왕의 대통을 잇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흥선군의 아들이 세상 떠난 익종의 후사가 되어 왕위를 잇는다는 의미는 아직 열두 살에 불과한 어린 왕대신 익종 비인 자신이 섭정 권을 갖겠다는 의미이며,안동 김씨 세력에 눌려 지내던 풍양 조씨 세력을 다시 부흥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이 탄생했다. 그러나 고종의 즉위로 권력의 최정상에 오른 것은 고종도 조 대비도 아닌 흥선대원군이었다 또 사실고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그였다.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었지만,아버지인 남연군이 사도세자의 이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어 흥선군은 족보 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었다. 안동 김씨 세상에서 종친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궁도령이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손가락질 당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병약한 철종이 갑자기 죽는다면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 은밀히 계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동 김씨의 세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왕실의 최고 어른 조 대비에게 주목했다. 조 대비의 친정조카인 조성하• 조영하를 통해 극비리에 만난 조 대비와 흥선군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익종의 후사를 이어 대통을 계승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런 뒤 안동 김씨 집안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던 김병학과 궁중의 원로대신인 정원용 등을 만나 왕의 후계자가 논의될 때 지원을 부탁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한끝에 얻은 극적인 승리가 고종의 즉위였다.
세도정치의 막을 내리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개혁정책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과 대내적으로는 삼정의 문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먼저 내부 개혁에 착수한 흥선대원군은 노론 일당 전제와 세도 정치로 소외되어왔던 남인• 북인• 소론계의 유능한 인물들을 등용하고 지역 차별에 시달리던 서북인과 고려 왕조의 후손들에게도 관직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후 삼정의 폐단을 시정하기 시작했다. 일반 양인들만 지던 군역을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부과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해 군정을 개혁하고,지방관과 양반 토호들이 의도적으로 토지대장에 누락시켜 전세를 착복하던 땅을 찾아내 세금을 물게 함으로써 전정의 폐단을 없앴으며,환곡제(還穀制)를 사창제(社倉制)로 바꾸어 지방관이나 아전이 농간을 부릴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봉쇄했다. 이로써 국가의 수입을 확대하고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양반들은 새롭게 부과된 군역의 의무에 불만을 표시했다.
여기에 서원철폐라는 강경수를 두자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본래 서원은 선현을 제사 지내고 양반 자제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쟁의 근거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수탈하고 지방관까지 무시하는 권력 기관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사대부들의 반발에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며 단호히 맞서,서원의 횡포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서원에 딸린 땅과 노비를 몰수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늘렸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반발은 이후 대원군 실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또한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무리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노동력을 강제 동원하면서 일반 양민의 지지까지 상실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는 차츰 좁아 들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을 펼쳤다. 청의 권고를 무시하고 서구 열강과 일본에 대해 극단적인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며,미국• 프랑스 등과의 무력 충돌도 피하지 않았다. 외국의 침략자와 내응한다는 이유로 천주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했고,외국인의 출입은 물론 서양 물품의 수입도 봉쇄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한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세운,‘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척화비(斥和碑)의 내용은 그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지 10년,그사이 어린 고종은 성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시아버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야심찬 며느리 명성황후가 있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쇄국이 아니라 개화에 조선의 살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흥선대원군실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또 다른 쇄국론자 최익현의 상소였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을 비판하며 흥선대원군이 정부 업무에 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 과감한 상소에 대해 최익현을 변호하고 칭찬함으로써 자선의 입장을 분명히 표시한 고종은 1873년(고종 10) 창덕궁의 흥선대원군 전용문을 사전 통보 없이 폐쇄해 버렸다.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쫓겨난 흥선대원군은 물러나, 경기도 양주의 직곡 산장에 은거하며 화를 달랬다.
그러나 그렇게 물러나기엔 권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집념이 너무 컸다. 이후 그는 여러 차례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1881년 자신의 서자 재선을 국왕으로 추대하려는 고종 폐립 사건에 관여했으며,1887년에는 큰아들 재면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재집권에 성공하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뒤,그 수습 책임자로 정권을 다시 잡았다가 한 달 만에 임오군란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간 청나라에서 유폐 생활을 해야 했고,1894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며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친일개화파 정부의 총리로 옹립되지만,일본군을 몰아내려던 계획이 실패하면서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가 1898년(광무2) 일흔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평 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를 이끌며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친 개혁가이다. 세도정치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어나던 그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하지만 격변의 시대에 흥선대원군은 그 흐름을 읽어내지 못했다. 개방이라는 시대정신에 역행했고,국력 강화가 아니라 왕권 강화에 집중했다는 것은 분명한 그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왕비 민씨가 우두머리인 민씨 척족은 왕궁 내의 거의 모든 권세와 부귀 있는 자리를 독차지하여 미움을 사고 있다. 만약 실력 있는 지도자가 출현한다면 혁명을 바라는 사람들이 이 인물 주위에 결집할 것이다. 현재로선 강력한 의지와 정신력의 소유자인 흥선대원군 말고는 그런 역할을 담당할 인물이 없는 것 같다”는 주한미국공사 허어드(Heard,Augustine)의 보고서 내용처럼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신망 받는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도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것은 서원철폐 등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했던 유생들이 남긴 부정적인 기록과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대대적으로 탄압받았던 기독교인들이 남긴 평가 때문이다.
한편, 미국인 헐버트(Hulbert,Homer Bezaleed)는《한국견문기》라는 글을 통해 “그는 목표가 정해지면 정치• 경제 • 도덕 등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굴하지 않고 목표 달성을 위해 돌진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실로 그는 조선 정계의 마지막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며 흥선대원군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임오군란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군제 도입과 민씨 정권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구식 군대의 변란. 당시 군인들은 한 달에 쌀 4말 정도를 급료로 받는 하층민 출신의 고용 군인이 대부분이었다. 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양이었지만,그나마 재정 악화로 13개월이나 급료가 밀려 있었다.
여기에 1881년 군제 개혁으로 많은 군인이 일자리를 잃었고,신식 군대인 별기군에게만 특별대우를 하자 군인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이러한 불만을 달래기 위해 1882년 6월 5일 정부는 밀린 급료 중 한 달치를 지급했다. 그러나 그 쌀은 양이 모자랐을 뿐 아니라 쌀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섞여 있었다. 이에 군인들이 분노해 관리들을 구타하자 병조판서가 주동자를 처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군인들은 9일 봉기하여 선혜청 책임자인 민겸호(閔謙鎬)의 집을 공격하고,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갖췄다. 이들은 포도청과 의금부를 습격하고 민씨 일파와 개화파 관료들의 집을 공격했다. 또한 별기군 훈련장을 습격해 일본인 교관 등을 처단했으며,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 10일에는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겸호 등 대신들을 죽이고 명성황후를 찾았으나 이미 도망한 뒤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겼다. 흥선대원군은 의욕적으로 정계개편을 단행했지만,이는 3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소식을 들은 청이 4,000여 병력을 이끌고 와 흥선대원군을 끌고 갔기 때문이다. 청은 명성황후를 지원하여 민씨 일파의 정권을 세우는 한편,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 군대를 남겨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최익현 1833~1906 조선 후기 유림의 우두머리로 제자 수천 명에 이르렀다. 명성황후 세력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종의 친정을 주장해 결국 흥선대원군이 정치에서 밀려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전국에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돌리는 한편 납세 거부,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펼치자고 주장했다. 이듬해 전북 태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세상을 떠났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