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나는 울었네-김희갑///金元鳳

bsk5865 2015. 4. 28. 08:38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28 06:48

 

나는 울었네-김희갑///金元鳳(D)|★....演歌 게시판

黃圭源 http://cafe.daum.net/enkamom/KTiH/7184 


나는 울었네-김희갑


나는 울었네-김희갑

작사 김동일 작곡 박시춘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날 속일 줄
나는 울었네, 나는 울었네 나루터 언덕에서
손목을 잡고 다시 오마 던 그 님은 소식 없고 나만 홀로
이슬에 젖어, 달빛에 젖어 밤 새도록 나는 울었네


나는 속았네, 나는 속았네 무정한 봄바람에
달도 기울고, 별도 흐르고 강물도 흘러갔소
가슴에 안겨 흐느껴 울던 그대여 어디 가고 나만 홀로
이 밤을 새워 울어보련다 쓸쓸한 밤 야속한 님아


님도 울어라, 님도 울어라 지나간 옛추억에
물새 나르던, 물새 나르던 아득한 그 옛날 밤
그대는 가고, 세월은 흘러 오늘도 강 언덕에 홀로 앉아
별 하나, 별 둘, 헤어가면서 잊지 못해 우는 밤이여


金元鳳


생몰년도: 1898년-?
호: 약산(若山)
활동 분야: 독립운동,정치

생애와 업적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을 펴며 온건노선을 걷고 있을 무렵 만주 지린에서는 이에 반발하며 또 다른 길을 선택한 열혈청년들이 있었다. 독립을 향한 방법으로 직접적인 폭력을 선택한 이 열세 명의 청년들은 의열단을 결성하고,총독부의 고위관료,군부 수뇌,매국노,친일파 등을 암살하며,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조선식산은행,각 경찰서,기타 일제의 주요 기관 등 일제의 통치기구와 수탈기구를 파괴한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또한 공약에 일본을 몰아내고 조국을 찾겠다는 의지와 함께 “계급을 타파하고 땅의 권리를 고루 나눈다”는 강령을 넣어 사회주의 이념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들은 의벡으로 당시 스물두 살의 김원봉을 추대했다.

1898년 경남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중앙학교에서 공부하다 선후배인 김학수 • 이여성과 중국 유학길에 올라 난징의 금릉대학,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등에 적을 두었던 청년이다.

의열단 단원들은 깔끔한 신사복장을 하고 절도 있는 행동을 했으며,사격술과 무술에 능했다. 새로 가입하려는 단원은 몇 단계를 거쳐 애국심과 비밀요원으로서의 자격을 심사 받았고,일단 단원이 되면 인격수양,무술,양식 먹는 법,아이와 노인을 돕는 법 등을 익혀 국제 신사로 훈련 받았다.

1919년 11월 9일 결성된 이들은‘이듬해 봄부터 국내로 잠입해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등 테러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1920년 6월 조선총독부 파괴 계획이 드러나는 바람에 여섯 명의 의열단 원이 체포되었지만.9월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졌고. 12월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며. 1921년 9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1922년에는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김익상 등이 일본군 대장 다나카를 저격했다가 실패했다. 1923년에는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고. 1926년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다. 이들의 활동에 일제는 경악했고, 의열단의 명성은 점점 높아갔다.

1922년 겨울 김원봉이 베이징에서 신채호를 만나면서 의열단은 자신들의 투쟁에 이론체계를 갖춘다. 신채호는 김원봉의 부탁을 받고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해 당시 독립운동의 여러 갈래인 실력 ‘댄론 • 외교독립론 • 자치론을 비판하고,폭력투쟁과 민중직접혁명을 제창했다.“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제휴 하야 끊임 없는 폭력 • 암살 • 파괴 • 폭동으로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가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가 사회를 수탈치 않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로 끝맺는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원의 행동강령이 되었고,애국청년들을 폭력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의열단 활동을 통해 우리 민족을 각성시키고 전 세계에 독립 의지를 알리려 했던 김원봉이었지만 단원들 대부분이 비극적 죽음을 맞자 오랜 고민 끝에 1925년 새로운 길을 찾는다. 독립을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조직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직접 단원들을 이끌고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미 명성이 높아진 상태에서 군관학교 훈련생으로 입학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로 졸업한 뒤 그를 따르던 의열단원 들과 함께 더욱 강인한 독립운동지도자로 성장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군사지식만이 아니라 중국의 혁명사상과 공산주의 혁명이론 등 진보적인 사상을 접했고, 당시 교장이던 장제스,교관이던 저우언라이 등과 인맥을 맺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김원봉은 중국과 연합해 일본에 대항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황포군관학교 시절 친분을 맺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접촉한다. 중국과 조선이 합작해 일제를 타도하자고 약속한 뒤 국민당의 지원을 약속 받았다. 한때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김원봉이었지만 사상보다 민족의 독립을 우선시한 것이다. 국민당의 지원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항일투쟁의 핵심 간부를 길렀고,의열단과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재 중국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하는 5개 당을 모아 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민족혁명당에서 김원봉은 총서기를 맡으며 당을 이끌었다. 민족혁명당 창당을 계기로 김원봉은 김구에 필적하는 지도자의 위상을 확보한다.

조선혁명간부학교와 민족혁명당을 통해 조직을 갖춘 김원봉은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위해 마윌내 1938년 10월 100여 명의 한국청년들과 함께 조선 의용대를 탄생시켰다. 중국 중앙 정부인 국민정부가 최초로 인정한 한국인 정규 부대에서 김원봉은 총 대장직을 맡았다. “민족 제일”과 “독립 제일”이라는 두 개의 구호 아래 창설된 조선 의용대는 1920년대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그 명맥이 끊겼던 항일무장투쟁의 재개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조선 의용대는 중한연합을 통해 중일전쟁의 승리와 나아가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엘리트 출신들이 많았던 이들은 일본군 심문,첩보,암살,파괴 공작에 투입되어 큰 전적을 올렸으며,중국내 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는 정예부대였다.

그러나 1941년 조선의용 대는 동포들이 별로 살지 않는 중국 남부에서의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일본군과 직접 맞서고 있는 중국 북부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떠난 뒤에도 김원봉은 장제스가 있는 국민당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김원봉을 지원했던 국민당의 관심은 차츰 임시정부와 광복군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북부로 간 조선의용대가 팔로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원봉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국공합작 분위기가 식어가면서 국민당과 공산당 양쪽 모두와 손잡은 적 있는 김원봉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제의 소탕전에 조선의용대가 큰 타격을 입고 김원봉과의 연결 고리마저 끊기자, 김원봉은 국민당의 권고를 받아들여 남은 대원들을 이끌고 광복군에 편입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그는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고 광복군부사령,임시정부군무부장을 역임했다.

광복군의 대일항쟁이 막 본격화되려는 순간광복이 찾아오고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의 자격과로 조국의 땅을 밟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결정을 둘러싼 좌우대립 속에서 좌익 계열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한 김원봉은 악명 높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일제시대에도 당한 적 없는 수모를 당하자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또한 친일파와 우익들의 표적이 되어 항상 테러를 피해 옮겨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에 남아 북한정부 수립에 참가해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고, 1954년 노동상,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승진했으며 이듬 해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노동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지만,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숙청설과 자살설 등이 전할 뿐이다.

평 가
월북 후 그의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가한 김원봉은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한에서 언급하기 어려운 금기의 인물이었다.하지만 북한의 역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민족해방운동사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으로 한정 지은 북한의 역사도 그의 활동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은 김원봉이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현대사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그가 우리 역사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한 평가가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열단 단장,민족혁명당 총서기,조선의용대 대장,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이라는 굵직굵직한 역할을 맡아 민족해방운동에 매진해왔던 그에 대한 연구는 김원봉이 우리 역사에 ‘공헌한 부분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다.

님 웨일스(Wales,Nym)의 소설 《아리링》에서 김산은 김원봉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 자료를 만들어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회사를 말한다.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 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 받고,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했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000여 정보에 달했다. 이와 같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퍼센트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퍼센트 이상의 고리를 현물로 거둬들였다. 또한 그 소유지는 일본인 이주자에게 싼값으로 양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고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뽑아 일제의 대변자이며 조선 민중을 착취하는 앞잡이로 삼았다.


남북협상

5•10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이 1948년 4월 19일에서 30일까지 평양에서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벌인 정치협상을 말한다.1947년 11월 국제연합(UN)은 미국이 제안한 한국통일안을 가결했으며,이에 따라 1948년 1월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이 이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남북을 통한 선거는 불가능해졌다.

이에 이승만 세력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 뒤에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룩하자고 주장한 반면,김구와 김규식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이 국토의 영구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자 중간파 정치 세력인 김규식 측의 제안에 따라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 •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서신을 보냈다. 한편 국제연합소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방안을 가결했다.

그러던 중 북한은 평양에서 모든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을 이룩하자는 내용의 결정을 평양방송으로 방송하면서 남한 대표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김구와 김규식은 북행 길에 올랐고,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19일부터 모란봉극장에서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미 • 소 양군의 즉시 철군을 요청하는 매시지를 전달할 것을 결의 • 채택하였으며,단선단정반대전국투쟁위원회 결성을 끝으로 공식일정을 마쳤다. 이어 27일부터 전조선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시작되었으며,15인 회담 •4김 회담 등이 개최되었으나 결국 남북협상은 성과 없이 막을 내렸고,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했던 인사들은 배제되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