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물방아 사랑-남인수///尹東柱와 李陸史

bsk5865 2015. 4. 27. 08:39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27 06:35

 

물방아 사랑-남인수///尹東柱와 李陸史(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176 


물방아 사랑-남인수


물방아 사랑-남인수

작사 박영호 작곡 박시춘


달뜨는 저녁에 지은 맹서가
꽃피는 아침에 무너졌구려
봄 없는 청춘은 이런 것이냐
울어도 웃어도 풀 길이 없네


세월은 덧없고 인생은 늙고
못 잊을 미련만 어이 길던고
뜬세상 인정은 이런 것이냐
속아도 내 운명 속여도 내 운명


상처 진 내 가슴 달랠 길 없고
가버린 옛사랑 찾을 길 없네
꿈같은 과거는 눈물이 드냐
버들잎 사랑은 물방아 사랑


尹東柱와 李陸史

尹東柱

생몰년도: 1917년-1945년
활동분야; 문학
다른 이름: 윤해환(尹海煥)


李陸史

생몰년도: 1904년-1944년
자: 태경(台卿)
활동 분야; 문학,독립운동
다른 이름: 01원록(李源綠)/이원삼(李源三)/이활(李活)

1940년대 전반,문학사적 암흑기에 민족적인 의지와 양심으로 시를 쓴 저항시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윤동주와 이육사이다. 유치진 • 주요한 등 같은 시대 시인들이 친일의 길을 걷던 때,일제에 저항하다 끝내 옥중에서 젊은 목숨을 잃은 이들 두 시인은 민족사의 자부심이다.

일제 말기의 암흑기에 저항의 시를 쓴 시인이라는 점,일본유학을 했다는 점,‘독립운동’을 이유로투옥되어 감옥에서 생을 마친 점, 광복을 눈앞에 두고 짧은 생을 마친 점,광복 이후에야 첫 시집이 출간된 점 등이 두 시인의 공통점으로 꼽힌다.

문학과 조국을 가슴에 품었던 두 시인. 그러나 윤동주와 이육사의 저항의 방식은 극단적으로 달랐다. 문학과 조국이 갖는 그 의미의 크기가 달랐던 때문일까. 아니면 표현하는 방법의 차이였을까.

어린 시절부터 흐트러짐 없이 문학의 길을 걸었던 윤동주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1917년 윤영석과 김룡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넉넉한 집안 형편에 외아들이었던 아버지가 혼인한 뒤 8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명동촌은 외삼촌인 김약연 등 네 가문이 이주해 개척한 곳으로 교육과 종교,독립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20세기의 첫 해에 이주민이 된 윤동주의 선조들은 다른 이주민들과 함께 농토를 일궜다. 함경도 지방의 지식인이면서 선각자인 이들은 명동촌에 명동학교 등의 교육기관과 여러 개의 교회를 세워 종교와 교육,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가꾸어나갔다. 윤동주도 태어나면서부터 유아세례를 받을 정도로 기독교적인 가풍 속에서 자랐다.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반면,열일곱 번의 옥살이가 말해주듯 조국의 독립에 온몸을 던졌던 이육사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가호와 허길의 5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리고 안동은 독립운동의 첫 장이 열린 곳이며,가장 많은 독립유공 포상자를 배출한 곳이자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이다. 강직한 퇴계 학통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다.

이육사 집안도 매우 저항성이 강했다.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던 맏형만 제외하고 그의 형제 모두가 한꺼번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던 적도 있다. 이렇듯 강직한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이육사는 성장했다.

학구열이 높았던 명동촌에서 성장한 윤동주는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던 그곳에서 조선역사와 민족주의 및 독립사상 교육을 받았다. 명동소학교의 가장 중요한 학과목은 조선역사와 조선어였다.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러 애국정신을 높였다.

이 무렵 윤동주는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어린이》. 《아이생활》 등의 아동잡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했으며,《새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만든 문예지를 통해 동요 ,동시 등을 발표했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뒤 달라자〔大拉子〕소학교에 편입했다가 릉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은진중학교 시절에도 친구들과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열여덟 살이 되던 1934년부터는 자신의 작품에 창작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5년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학교에 편입했는데,이때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다시 롱징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고,이 무렵 동주(童舟) 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 <비자루> . <오줌싸개지도> . <거짓부리〉등을 발표했다.

진학을 앞두고 의대를 원하는 아버지와 대립했지만,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중재로 문과반 진학을 허락 받고 1938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선) 문과에 송몽규와 함께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이미 송몽규는 일제 경찰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에서 외솔 최현배에게서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사사하고 사상적인 면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연희전문환교 시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서시). <자회상). <별헤는 밤〉 등의 원숙한 작품을 남겼다. 그러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했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은사의 만류로 포기했다.

사실 이 무렵까지 윤동주는 비교적 순탄한 삶을 누리며 문학에만 전념했다.조국을 잃은 청년의 상실감,방황 등이 시에 나타나기는 하지만,‘세찬 바람을 동반한 폭우’ 속에 섰던 이육사의 삶에 비하면‘흐린 날의 우울함’ 정도였다고 할까.

한편 이육사는 일곱 살 때 형제들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소학을 배우면서 교육을 시작했다 사서를 모두 마칠 때까지 한학을 공부했다.그리고 문중학교인 보문의숙(寶文義塾)이 공립으로 개편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1회로 졸업했다. 그 뒤 장인이 있던 백학학원 (白鶴學院)에서 중등 과정을 마친 뒤 9개월 정도 교원으로 근무하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 유학했던 기간은 9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건강 때문에 오래 지속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리고 1925년 이육사는 항일투쟁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26년 베이징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으로 공부하다 이듬해 귀향했는데,그때 장진흥 의거에 연루되어 그의 형제 네 명이 모두 구속되었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신문지로 싼 폭탄이 배달된 사건이 장진홍 의거이다. 처음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경은 범인은커녕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범인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이육사의 4형제가 모두 체포돼 세 명이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기던 중 실제 사건의 주인공인 장진홍이 체포되면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육사라는 이름은 이때 그의 죄수번호가 264이어서 그것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에서 비롯됐다 전해진다.

석방된 뒤〈중외일보), <조선일보〉 대구지국 등에서 근무하며 이활 • 이육사(二六四)의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는 도중에도 대구격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났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점에서 대구 거리에 일본을 배척하는 격문이 나붙고 거리에 뿌려졌는데,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에는 증언과 증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억울하게 체포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1931년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간 이육사는 의열단에서 운영하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생으로 입교했다. 이육사는 이후 의열단에서 설립한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의열단에는 결코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이것이 일제하의 증언이고 또한 의열단에서 설립한 학교의 제1기생이었다는 정황으로 보아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 졸업한 뒤 이육사는 국내의 노동자 농민에게 혁명의식을 고취할 것과 2기생 모집을 위한 사명을 받고 귀국했다.

그러나 국내 공작원으로서 사명을 행동에 옮기기 전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일제는 그가 만주로 사라진 뒤부터 요주의 인물로 수배 중이었다.‘배일사상,민족자결,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을 것으로,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1934년 안동경찰서 보고 내용이다.

군사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1943년 베이징에 갔다가 귀국한 뒤 다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베이징에서 귀국할 때 무기를 반입하려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40년대 들어 국내에 독립군 같은 조직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과 연관이 있었던 듯하다. 검거된 뒤 베이징으로 끌려간 것이 그의 마지막 길이었다.

1944년 1월 16일 이육사는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같은 마을 출신이자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친척이 관을 인수해 화장을 한 뒤 유골이 든 상자를 국내로 보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고향 마을 뒷산에 다시 묻혔다. 무려 열일곱 번의 옥살이 끝에 결국 옥에서 숨을 거둔 고단한 삶이었다.

한편 윤동주는 1943년 일본에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구금됐다.

1942년 처음 도쿄 립교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가을학기 도쿄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편입해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 길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도쿄대학에 재학 중이던 송몽규도 함께 체포되었다. 윤동주는 재판 결과 독립운동 의 죄목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규슈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투옥 중 윤동주는《신약성서》를 입으며 매달 엽서 한 장씩을 고향집으로 보냈다. 그러다 1945년 2월 엽서 대신 ‘2월 16일 동추 사망, 시신을 가져가라”는 전보가 배달됐다. 아버지와 당숙이 일본으로 가면 저 송몽규를 면회하니,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는 송몽규는 여윌 대로 여위어 있었고 윤동주도 같은 주사를 맞았음을 알았다. 송몽규도 윤동주가 사망한 23일 뒤 옥사했다. 이육사처럼 윤동주도 한줌의 재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해 3월 가족과 친지들은 롱징에서 장례를 치르고 단오 무렵 지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당시까지 시인으로 정식 등단한 적도 없고 세상에 발표한 시집 한 권 없었지만,자선 육필 시집이 있던 터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인’이라 이름 붙여주었다.

윤동주와 이육사는 달랐던 삶만큼 남긴 작품의 성격도 다르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 중에서)"는 구절로 대표되는 이육사의 시가 “절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초인 의지를 강렬한 남성적 어조로 표현”했다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서시〉중에서)"고 고백한 윤동주는 여성적인 어조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 그녀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했다”고할 수 있다.

윤동주의 이러한 경향은 심지어“윤동주의 시는 저항시가 아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시가 일제 패망 후에 공개되었으며,시의 내용에서 어떤 저항성도 표출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그의 시는 저항 시라기보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자기성찰이 반영된 서정시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며,또한 그가 저항했던 대상은 외부의 물리적 압박이나 조국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지신이었다는 논의도 있었다.

하지만,일제의 탄압 앞에 굴복하지 않고 조선 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자세, 일제의 조선강점이라는 민족의 비극적 현실과 슬픈 운명을 통탄한 시의 내용,새 세상의 도래를 안타까이 바라는 열렬한 동경은 분명‘저항’ 의 몸짓이었다.

이육사에게는 시나 문학보다 조국이 더 컸다.1933년《신조선》에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했지만,작품 수도 많지 않고 문단 활동도 별로 하지 않았다. 짧은 생애를 오직 독립투쟁을 위해 바쳤기에 문단 생활에 전념 할 정신적 겨를이 없었다.그의 작품들은 대륙을 내왕하면서 품었던 조국에 대한 무한한 향수,그렇지 않으면 조국 광복에 대한 애타는 바람의 표현이다.


최현배

1894~1970. 국어학자.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과 문법을 배웠다 1925년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으며,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연세대학교 교수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거쳐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20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지내며 한글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저서로 《우리 발본》《한글갈》 《한글의 투쟁》. 《한글만 쓰기 주장》.《페스탈로치의 교육시장》. 《나라 건지는 교육》 등이 있다.


장진홍

1895~1930--1914년 비밀한인결사인 광복단에 입단했다. 1918년 이국필(李國弼)과 같이 하바로포스크로 가서 교포청년들을 규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귀국해 3•1운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한 뒤,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인천에 들어온 미국 군함의 하사 김상철(金相哲)에게 주면서 각국엔 배부할 것을 부탁했다 1925년 중국 베이징에서 무기를 가지고 잠입한 이정기(李定基)와 접속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27년 일제의 고관 살해와 중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을 제조하여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9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자결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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