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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ぶし-島津亜矢///親日 大臣 宋秉畯의 妄動

bsk5865 2015. 4. 29. 08:35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4.29 06:47

 

海ぶし-島津亜矢///親日 大臣 宋秉畯의 妄動(D)|★....演歌 게시판

黃圭源  http://cafe.daum.net/enkamom/KTiH/7192 


海ぶし-島津亜矢


海ぶし-島津亜矢

作詞 塚口 作曲 桜田誠一


おなご雪浪 かいくぐり
岬がくれに 船を待つ
髪を束ねで 日暮れには
くずれ番屋で 飯を炊く
ヤンアレサ 追分の 海で鮭をとる
ヤンアレサ 男衆は 汗で銭をとる


砂にさらされ 転がって
浜にゃ涙の 廃船一つ
飲んで踊った 万祝いも
爺さま婆さまの 語り草
ヤンアレサ 追分の 風い揺られながら
ヤンアレサ 男衆は 腰で舵を切る


おなご飛沫に 叩かれて
今日も大漁の 夢を抱く
凍る昆布を 引きながら
十の指から 血を流す
ヤンアレサ 追分の 海で鮭をとる
ヤンアレサ 男衆は 汗で銭をとる


親日 大臣 宋秉畯의 妄動

大韓每日申報 1909年 3月 7日 論說은 異例的으로 '宋秉畯'이라는 實名을 題目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宋秉畯이 갑작스럽게 內部大臣을 辭職하고 日本으로 건너간 直後 發表된 論說이라서 눈길을 끕니다. 特히 "이곳에 있으면 事件이 重大한즉 罪를 論斷하는 일이 있을까 念慮하여 日本으로 避하고…"라는 대목이 궁금하네요. 權力의 核心에 올라 있던 宋秉畯이 大臣의 職位를 잃을 만큼 問題가 된 '罪'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宋秉畯(1857~1925)은 武官 出身으로 甲申政變 直後 日本을 오가며 變身을 거듭하였습니다. 金玉均과 連累되어 逮捕令이 내려지자 野田平治郞(のだへいじろう)라는 이름으로 日本에서 숨어 지내다 러日戰爭 當時 日本 陸軍省의 通譯官이 되어 1904年 歸國했습니다. 그리고 親日團體 一進會를 組織하여 이 團體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1907年 李完用 內閣의 農商工部大臣이 되었고, 1908年 內部大臣에 올라 權力을 휘둘렀습니다.

宋秉畯의 辭任은 1909年 年初에 決行된 純宗 皇帝의 地方 巡行과 聯關되어 있습니다. 正初에 이루어진 南道 巡行에 이어 1月 27日부터 2月 3日까지 平壤•新義州 等地를 돌아보는 西道 地域 巡行이 이어졌습니다. 伊藤博文은 統監政治의 治績을 宣傳하기 爲해 純宗 皇帝를 내세워 地方 巡行을 決行했습니다. 宋秉畯이 內部大臣으로 隨行했음은 勿論입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事件이 터졌습니다. 大韓每日申報 1909年 2月 5日字 '雜報'란에서는 皇帝의 地方 巡行 中 일어난 宋秉畯의 妄動을 傳하고 있습니다. 皇帝 一行이 平壤에 到着할 즈음에 宋秉畯이 술에 醉한 채 女官(皇帝를 시중하던 宮女)들이 타고 있던 列車 칸으로 들어갔습니다. 侍從武官 魚潭이 制止했지만, 宋秉畯은 이를 뿌리치며 自身이 차고 있던 칼을 빼 들고는 魚潭을 내리치려 했습니다. 魚潭도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挽留하여 事態는 더 以上 進展되지는 않았지만, 宋秉畯은 이 일로 總理大臣 李完用과도 크게 다툰 것으로 報道되었습니다.

皇帝의 地方 巡行을 陪行하던 內部大臣이 宮女들이 있는 汽車간에 들어가 벌인 이 駭怪한 亂動이 世上에 알려지자 與論이 들끓기 始作했습니다. 魚潭은 歸京 後 이 事件을 皇帝께 詳細히 奏達하였고, 統監府에도 報告했습니다. 宋秉畯을 批判하는 數많은 匿名書가 內閣에 答紙하였고, 內閣에서도 深刻하게 論議하게 되었습니다. 伊藤博文이 事件을 撫摩하기 爲해 宋秉畯을 불러 叱責하였다는 報道(1909. 2. 10.)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狀況이 惡化되자 宋秉畯은 日本에 滯留 中인 皇太子의 새해 問安을 爲해 日本으로 간다는 勅令을 받아내고는 內部大臣을 辭職하였습니다. 그는 1909年 2月 9日 歸國길에 오른 伊藤博文을 따라 日本으로 避身하였습니다.(1909. 2. 11.) 宋秉畯은 그곳에서 一進會를 操縱하여 '日韓合邦上奏文'이라는 것을 提出하도록 했습니다. 1910年 韓日合邦 直後 그는 子爵 爵位를 받고 總督府 中樞院 顧問이 되었으며, 1920年에는 伯爵 地位에 올랐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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