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樽でもう一度-加門亮 作詞 礼恭司 作曲 森川龍
一 とどけにきたよ 夜霧に濡れて おれがこわした あの幸せを つぐないたくて つぐないたくて 噂たぐって 北の町 ああ詫びたって 遅すぎるけど 東京の愛を 小樽でもう一度
二 おれの二倍も 傷つきながら 捜さないでと あの部屋消えた 心も凍てつく 運河のほとり やっと逢えたね 霧の夜 ただ涙ぐみ うつむくおまえ 東京の愛を 小樽でもう一度
三 過去(むかし)のことは なんにもふれぬ そんなやさしさ なおつらいのさ 待たせたままの 待たせたままの 碧いサファイア その指に もう泣かせない 離しはしない 東京の愛を 小樽でもう一度
太宗과 外戚들 國王이나 王世子의 丈人을 ‘國舅’라고 하는데, 東班 正1品에 除授되는 戚里입니다. 王의 外戚을 戚里라고 부르는 理由는 漢나라 때 長安(西安)의 戚里라는 마을에 임금의 姻戚들이 살았던 데서 基因합니다.
朝鮮의 戚里는 品階는 높아도 政事에는 參與할 수 없었는데, 이런 原則을 만든 임금이 太宗이었습니다. 太宗이 夫人인 元敬王后 閔氏의 親동기 넷을 死刑시킨 事件은 너무 有名합니다. 閔無咎,•閔無疾은 어린 世子(讓寧大君)를 끼고 權力을 잡으려 했다는 ‘挾幼執權(협유집권)’ 嫌疑로 處刑했고, 閔無恤과 閔無悔도 그 延長線上에서 除去한 것입니다.
太宗은 上王 時節 世宗의 丈人 沈溫도 除去했습니다. 領議政 沈溫이 謝恩使로 明나라에 갈 때 餞別하는 車馬가 長安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自身의 死後 世宗의 王權 强化를 爲해 除去한 것입니다. 沈溫의 同生인 總制 심정이 上王 警護 問題를 言及한 것을 逆謀로 몰아 죽이고 沈溫까지 連累시킨 것입니다. 이 非情한 外戚 除去에 對해 李瀷이 ‘星湖僿說(성호사설)’人事文에서 “閔氏•沈氏 두 집안이 함께 凶禍를 當하게 되었으니, 大槪 먼 將來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肯定했듯이 歷史의 評價는 冷酷한 것입니다. 中國에서는 漢文帝가 妻男 두광국(竇廣國)을 쓰지 않고, 外叔인 將軍 薄昭를 죽인 것을 들어 높이 評價합니다.
그런데 外戚의 政事 禁止는 꼭 임금의 勞力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太宗 때 讓寧大君의 丈人 金漢老의 妻男이었던 大護軍 全孟謙이 저자 사람의 生鮮을 빼앗자 經濟 問題를 擔當하는 京市署는 卽刻 告發했고 司憲府도 그를 論駁했습니다. 太宗이 讓寧大君의 夫人 淑嬪을 생각해 容恕했으나 두 機關은 再次 告發했고, 太宗은 할 수 없이 태(笞) 40대를 때렸습니다. 한때 大統領 査頓의 飮酒運轉 事故를 뒤덮기에 汲汲했다는 非難을 받는 現在의 警察과 靑瓦臺 民情首席室이 본받아야 할 嚴格한 勤務 姿勢가 아닐 수 없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