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論介의 生涯와 業績 [ 이재호 곡 해설]

bsk5865 2015. 5. 1. 09:0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5.01 06:27

 

論介의 生涯와 業績 |★....일반 게시판

정 수 억 |  http://cafe.daum.net/enkamom/KWfw/29854 





南江의 追憶-南仁樹

作詞 무적인 作曲 이재호


물소리 구슬프다 안개 내린 南江에서
너를 안고 너를 안고
아아~ 울려주던 그날 밤이
울려주던 그날 밤이
음음~ 다시 못 올 옛 꿈이여


矗石樓 옛 城터에 가을달만 외로 히
落葉소리 落葉소리
아아~ 凄凉 코나 그날 밤이
너를 안고 울었소
음음~ 불어라 望鄕歌를


晋 州

晋州가 밤마다 한 송이 夜花로 피어납니다. 晋州城 앞 南江 一對가 밤이면 파리의 세느 江보다 더 아름다운 不夜城을 이룹니다. 矗石樓(촉석루)와 義巖, 竹林숲 等이 南江을 따라 제각기 恍惚한 불빛을 쏟아냅니다. 江이 아름다운 都市인 晋州의 밤 風景은 그야말로 浪漫的이고 한便의 詩가 되네요. 倭將을 矗石樓 밑 바위로 誘因한 뒤 부 잡고 간낭콩 꽃보다 더 푸른 南江에 뛰어 들어 殉節한 論介도 南江의 夜景에 마음을 빼앗겨 버릴지도 모릅니다.

夜景이 恍惚한 南江 邊에서 散策을 즐기는 것이 晋州 旅行의 魅力입니다. 晋州가 밤마다 한 송이 夜花로 피어나기 때문에 感性이 全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晋州에서 밤잠을 이루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네온사인과 街路燈이 하나 둘씩 켜지면 德裕山과 智異山의 실핏줄 같은 溪谷을 쉴새 없이 달려온 南江은 마치 새롭게 端裝한 각시처럼 華奢한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晋州城과 矗石樓, 그리고 晋州橋와 天壽橋 等이 빚어내는 불빛이 南江의 검푸른 물결 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깊은 강물 속으로 길고 긴 빛의 그림 지를 드리우면서 韻致를 더해갑니다. 장어거리의 네온사인과 모텔의 불빛도 그윽한 빛으로 은은하게 일렁입니다. 論介가 倭將을 안고 몸을 날려 千秋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듯이 南江도 都市에서 쏟아내는 불빛을 비춰내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晋州의 夜花 구경은 晋州橋에서 始作됩니다. 江 너머 晋州城 周邊으로 따뜻한 오렌지色 照明이 불을 밝히고, 南江 絶壁의 바위 들은 부드러운 불빛으로 거친 속살을 가립니다. 矗石樓도 눈 부신 照明 옷을 입어 밤이면 더욱 威風堂堂해집니다. 江 건너便에서 權座를 누리는 龍床만큼이나 華麗한 불빛을 받고 있는 矗石樓를 바라보면 마치 晋州城을 어머니 젖가슴처럼 품고 있는 듯 합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아름드리 기둥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듯 하고 처마 아래 丹靑은 색동저고리와도 같습니다. 朱黃色 照明을 받은 城壁은 어둠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고 南江의 흔들리는 물결은 꽃처럼 滿開합니다.

晋州城 맞은便 千年 廣場에서는 스테인리스 管 1000個에서 형 형색의 照明이 發散되는 噴水가 제멋을 뽐내며 빛의 饗宴을 펼칩니다. 節槪를 象徵하는 대나무를 形象化한 ‘새千年의 빛’ 이라는 作品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불을 밝힌 竹林 散策路가 있어 色다른 散策을 졸길 수 있습니다. 神秘스런 雰圍氣의 푸른 대 숲속을 걸으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새의 지저귐을 듣다 보면 그저 世上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하게 느껴져 근심걱정이 사라집니다.

天壽橋 아래 南江 둔치의 音樂噴水는 클래식부터 댄스 曲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音樂에 맞춰 춤을 춤니다. 갖가지 色깔과 形態의 빛이 交差하는 噴水는 밤의 情趣를 더욱 깊게 합니다. 垂直으로 솟아오르는 물 즐기는 너울너울 날갯짓을 하다가 한 瞬間 虛空을 박차고 올라 파르르 떱니다. 滔滔한 南江의 夜景 속을 천천히 걸으면 가슴 벅찬 恍惚境에 빠집니다. 그리고 뭔지 모르게 짠해지고 눈물을 뿌리계 됩니다.속 깊은 歷史의 傷處를 沈澱시키고 그저 滔滔하게 흘러가는 江물은 받 로 先生이 日帝植民의 時代에 晋州에 내려갔다가 쓴‘論介’의 한 句節을 읊조리게 합니다.


“거룩한 憤怒는/宗敎보다도 깊고/불붙는 情熱은/사랑보다도 强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그 물결 위에/楊貴妃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숨 막히도록 印象的인 風光 아침 해가 떠오르고 照明이 잦아들면 晋州는 化粧氣 걷힌 얼굴로 歷史를 이야기합니다. 南江은 남가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숨 막히도록 印象的인 風光을 보여줍니다. 새벼리 絶壁과 뒤벼리 絶壁을 지나면 晋州城의 絶壁이 江을 따라 펼쳐집니다. 屛風絶壁 위로 晋州의 象徵인 晋州城과 矗石樓가 사뿐히 내려 앉아 있습니다. 晋州城은 三國時代에는 居列城, 統一新羅時代에는 萬興山城 高麗時代에는 矗石城, 朝鮮時代 이래는 晋州城, 晉陽城으로 불렸습니다.

壬辰倭亂 3大 大捷의 하나인 晋州大捷이 벌어졌던 晋州城을 꼼꼼히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였습니다. 矗石門을 거쳐 晋州城으로 들어서면 벼랑에 우뚝 솟은 樓閣이라는 뜻의 矗石樓를 만나게 됩니다. 하늘을 떠받치듯 威容을 자랑하는 26個의 기둥과 단 한 그루의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대들보 가 눈길을 끕니다. 密陽 嶺南樓, 平壤 浮碧樓(南原 廣寒樓)와 함께 3大 樓閣으로 손꼽히는 矗石樓는 嶺南 第一의 名勝입니다. 高麗 때 세워진 晋州城 南쪽 樓閣으로 壬辰倭亂과 韓國戰爭을 거치며 불탄 것을 1960年 復原했습니다. 戰時에는 晋州城을 지키는 指揮本部였고, 平常時에는 考試場이자 선비들이 風流를 즐기던 곳이었습니다. 矗石樓 樓閣에 오르면 눈 아래 펼쳐지는 風光이 멋져 발길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습니다.

矗石樓 옆에는 論介의 影幀과 位牌를 모신 祠堂 義妓祠가 자리잡고 있는데,懸板왼쪽엔 舊韓末 晋州妓女인 山紅의 作品이 걸려 있습니다. 論介가 壬辰倭亂 때 忠節을 지켰다면 山紅은 舊韓末 日帝의 侵略에 抗拒한 妓生입니다. 山紅은 乙巳五賊 中의 한名인 李址鎔이 千金을 가지고 와서 妾이 되어 줄 것을 要請하자‘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의 妾을 하느니 차라리 맞아 죽겠다’고 맞섰다고 합니다. ‘황소의 목은 꺾어도 晋州 妓生의 志操는 못 꺾는다’ 는 말처럼 晋州 妓生의 節槪와 志操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矗石樓 밑 바위 한구석에는 ‘山紅’이라는 바위에 새긴 글씨가 아직 鮮明합니다.

矗石樓 아래로 난 階段을 따라 내려가면 論介가 殉節한 바위인‘義巖’이 江 위로 솟아올라와 있습니다. 豆腐 模樣의 넓적한 돌입니다. 原來는 威嚴한 바위라서 위암(危嚴)이라고 불렸으나 論介 投身 以後 義巖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1629年 鄭大隆이 새겼다는 義巖이라는 글씨가 鮮明하고 周邊 바위 壁에는 이런저런 俗人 들이 자거 이름을 새긴 글씨가 눈에 들어 옵니다. 義巖 바로 위쪽엔 ‘義妓論介之門’ 이 懸板이 걸린 義巖事績碑가 있습니다. 城郭 안을 걷다 보면 壬辰倭亂의 遺物들을 한곳에 모아 놓은 晋州 國立博物館, 朝鮮時代 觀察使의 關門이자 慶尙道 右兵營의 關門이었던 嶺南布政司‘壬辰倭亂 時 僧軍의 根據地가 되었던 護國寺와 晋州城 싸움에서 壯烈하게 殉節한 分들의 神位를 모신 彰烈祠 ,北將臺와 西將臺로 오르는 길에 時間을 빼앗기기가 십상입니다.

晋州城 周邊에는 觀光地에 걸맞게 名物 거리가 여럿이 있습니다. 그 中 晋州城 北將臺에서 내려다보이는 仁寺洞 骨董品 거리가 晋州城을 끼고 돌아다니기 알맞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工藝品, 石造物•古文書•書畵•陶瓷器 等을 다루는 20余 業所가 넘는 骨董品 가게가 道路邊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5O m 가량 되는 石物과 石物 사이를 걸어서 지나가야 제 맛이 납니다. 矗石門 앞 길 건너엔 文化觀光센터와 장어거리가 있습니다. 晋州城은 歷史를 담고,이들 名物 거리는 사람과 삶을 담고 있었습니다.

晋州城과 周邊의 거리를 둘러본 되 南江을 西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山들을 屛風처럼 뒤에 거느라고 있는 晉陽湖를 만나게 됩니다. 最高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혀는 晉陽湖 一周道路를 지나 展望臺에 오르면 하늘빛과 물빛을 온통 黃金빛으로 물들이는 저녁노을이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노을 속에 사라지는 智異山 자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旅行의 疲勞는 모두 걷히게 됩니다.

作成者 黃圭源
 
 
남강의 추억/최갑석| ▒ 가요,노래방
一悟 강석휘 | 조회 81 |추천 0 | 2013.11.30. 21:59
 

진양호

 

남강

 

 

진주성, 촉석루, 의암, 그리고 남강

 

 

옛 진주성과 남강

 

진양호 호안가에 있는 작곡가 이재호 노래비

 

이재호(李在鎬)

1919년∼1960년. 대중가요작곡가. 본명 이삼동(李三童). 경상남도 진주 출신.
일본고등음악학교 본과(바이올린)2학년을 수료하고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고향에서 휴양중 태평(太平)레코드사에 관계하는 친구의 소개로 가요작곡을 하게 되었다.
재래적인 한국가요의 서정성과 서양음악(반주음악)을 접목하여 재치있게 만들어냈고, 다작하는 정열을 과시하면서 유행가요를 많이 작곡하였다.

1938년 〈나그네설움〉으로 가수 백년설(白年雪)을 출세시켰으며, 같은해 〈불효자는 웁니다〉·〈꽃마차〉를 신인가수 진방남(秦芳男)이 취입하여 인기가수가 되었다.
1940년 〈복지만리〉·〈대지의 항구〉를 백년설이 취입하여 당대 최고인기가수로 각광을 받게 하였다. 이 곡들은 당시 우리 농민들을 만주이민으로 내모는 목적영화의 주제가이기도 하였다.

1942년 〈황하다방 黃河茶房〉·〈갈매기 쌍쌍〉으로 백난아(白蘭兒)를 출세시켰다.
1943년 이후 전시체제하의 물자결핍현상으로 레코드제작이 부진해지자, 태평레코드사의 전국 순회공연무대에서 연주단을 지휘하였다.

1945년 광복을 전후하여 고향인 진주고등학교 음악교사로 봉직하였고, 1946년 부산에서 〈귀국선〉·〈아네모네 탄식〉을 발표하였으며, 6·25동란중 부산방송국(HLKB) 전속악단장으로 취임하였다.
1952년 〈홍콩아가씨〉(琴糸響 노래), 1953년 〈경상도아가씨〉(朴載弘 노래) 등을 발표하였고, 환도 직후 1954년 〈무영탑 사랑〉(李寅權 노래)·〈물레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노래)·〈단장의 미아리고개〉(李海燕 노래) 등을 발표, 작품들의 완숙기에 도달하였다.

1956년 지병이 재발하여 마산요양원에서 휴양하면서 〈산장의 여인〉을 작곡하여 권혜경(權惠卿)에게, 〈울어라 기타줄〉을 영화녹음기사였던 손인호(孫仁鎬)에게 취입시켰다.
1957년 국민가요(공보처 제정)〈고향에 찾아와도〉를 발표하였고, 인기가수 남인수(南仁樹)에게 〈무정열차〉·〈산유화〉 등을 취입곡으로 주었다. 4·19 직후 〈피묻은 책가방〉이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미발표곡들을 남긴 채 타계하였다.

[참고문헌]
歌謠半世紀(韓國文化放送株式會社編, 省音社, 1975)
歌謠60年史(黃文平, 全曲社, 1983

이재호 작사.작곡/ 최갑석 노래 / 남강의 추억

http://cafe.daum.net/wlswndrh1539ghl/MyHU/48?q=%B3%B2%B0%AD%C0%C7%C3%DF%BE%EF%B3%B2%C0%CE%BC%F6&r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