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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安おろし-音丸///나라 판 돈 花鬪 판에 날린 李址鎔(D)

bsk5865 2015. 6. 5. 08:46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6.05 07:03

 

興安おろし-音丸///나라 판 돈 花鬪 판에 날린 李址鎔(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376 





興安おろし-音丸

作詩 佐藤惣之助 作曲 江口夜詩 編曲 水谷良一

赤い夕日に胡弓を抱いて
北に曠野をさまよえば
風もはるかな空で泣く

雲は流れる我が身は暮れる
行方涯なき大空に
同じ思いの一つ星

風は吹く吹く興安おろし
冬が来たのか野は枯れて
旅はどこまでつづくのやら

馬車が止まれば淋しい街で
飲んで踊って夜が明けて
落つる涙も砂の上

枯れたアカシアに雪降る頃は
いつも故郷を思い出す
雪は淋しや母恋し


나라 판 돈 花鬪 판에 날린 李址鎔

强制合邦이 다가오자 大臣들의 會合도 잦아졌습니다. 三三五五 무리를 지은 大臣들은 酒宴과 花鬪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中樞院 顧問 李址鎔, 侍從院卿 尹德榮 諸氏는 三昨日 밤에 중부 동곡 香蘭의 집에 모여 妓生 風流로 跌宕히 놀았다더라."(大韓每日申報, 1910.2.6.)

"再 昨日에 總理大臣 李完用氏 집 山亭에서 某某 官人이 모여 花鬪 판을 벌이고 노름을 한다는 말은 이미 揭載하였거니와 다시 들은즉 그때 노름하던 사람 中에 朴義秉氏가 3000환을 잃고, 李完用씨의 從姪 李容九씨가 5000환을 얻었다더라."(申報, 1909.3.4.).

1876年 開港 以後 日本 商人에 依해 導入된 花鬪는 傳統的인 賭博인 鬪牋과 骨牌를 代替하며 男女老少 上下 區分 없이 急速히 퍼져나갔습니다. 巡査 月給이 20환 남짓하던 時節, 現職 總理大臣 집에서 數千 환帶 花鬪 판이 벌어질 만큼, 花鬪는 當時 上流階級 日常에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李完用은 牽引症(筋肉이 쑤시고 아픈 症狀)을 甚하게 앓았는데, 그 苦痛을 잊기 爲해 門客들과 더불어 花鬪를 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李完用의 집에서 벌어진 數千 환帶 花鬪 판은 '賭博中毒者' 李址鎔의 집에서 벌어진 것에 比하면 '심심풀이'에 가까웠습니다.

"中樞院 顧問 李址鎔氏가 近日 自己 집에서 花鬪 판을 크게 벌이고 최진택氏의 돈 2万환을 빼앗아 먹었다고 憲兵司令部에서 그 事實을 偵探하는 中이라더라." (申報, 1909.4.9.)

"中樞院 顧問 李址鎔氏는 日前 自己 집에서 花鬪 판을 벌였는데, 어떤 시골 사람이 11万 환을 얻었다더라." (申報, 1910.3.15.)

李址鎔(1870~1928)은 思悼世子의 5代孫으로 高宗의 5寸 조카였습니다. 17歲에 科擧에 及第해 黃海道 觀察使, 宮內府 協辦, 駐日 全權公使 等 要職을 두루 거쳤습니다. 高宗의 寵愛를 한 몸에 받았지만, 賂物을 받고 郡守職 15個를 팔아 彈劾 받는 等 결코 淸廉한 官吏는 아니었습니다. 1904年 日本公使館으로부터 1万원을 받고 外部大臣署理 資格으로 日本公使 林権助(はやしごんすけ)와 韓日議定書를 調印했습니다.

이듬해에는 內部大臣 資格으로 乙巳勒約에 贊成해 乙巳五賊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過多한 판돈을 걸고 花鬪 판을 벌이다 物議를 일으켜 그의 이름이 新聞紙上에 오르내리기 始作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韓日議定書 調印 代價로 받은 1万원도 大部分 花鬪 판에서 날렸습니다.

1908年 以後 李址鎔은 朴義秉 김승규 민영린 等과 어울려 밤낮없이 數万 환帶의 花鬪 판을 벌였습니다. 그의 自宅은 全國의 노름꾼이 모이는 賭博場으로 變했고, 그가 愛之重之하던 漢江이 내려다보이는 龍山의 亭子도 花鬪 빚에 넘어갔습니다. 1910年 6月에는 高官들과 어울려 花鬪를 치던 自宅으로 日本 憲兵이 들이닥치자, 逃走하다가 얼굴에 重傷을 입기도 했습니다

花鬪로 끊임없이 物議를 일으켰지만, 李址鎔은 '合邦'에 寄與한 功勞로 强制合邦 以後 日本으로부터 伯爵 爵位와 恩賜金 10万원을 받았습니다. 그 後에도 그는 花鬪를 끊지 못하고 1912年 '지여땅'이라는 花鬪를 치다가 逮捕돼 裁判을 받고 貴族 禮遇가 停止되는 受侮를 겪었습니다. 腐敗하고 無責任한 王族의 典型이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