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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町しぐれ-笹みどり///日本商人과 開城商人

bsk5865 2015. 7. 26. 08:52

보낸사람: 소담 엔카 운영자 15.07.26 06:43

 

下町しぐれ-笹みどり////日本商人과 開城商人(D)|★....演歌 게시판
黃圭源 | 조회 138 |추천 0 |2015.07.26. 06:39 http://cafe.daum.net/enkamom/KTiH/7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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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町しぐれ-笹みどり

作詩 木下龍太郎 作曲 市川昭介 編曲 池多孝春


金じゃ解かせぬ 義理では解かぬ
意地の縦縞 おんな帯
路地の柳に 下町しぐれ
浮いた浮いたの お座敷だけど
芸の建前 押し通す


母に言われた 訳ではないが
後を継いでの 左褄
昔なじみの 下町しぐれ
濡れてただよう 大川端の
鳥もいまでは 代替り


惚れたお方も 居ないじゃないが
縁が結べず 片情け
女ごころに 下町しぐれ
ひとり手酌で 弾く爪弾きの
三味の音締も 湿り勝ち


日本商人과 開城商人

"開城의 經濟界를 支配하는 原動力은 말할 나위 없이 그 特産物인 人蔘이다. 그 製造量은 每年 1万5000根을 내려가지 않고 그 價格은 約 100万원이다. 開城의 經濟的 勢力은 단지 開城 附近에 머물지 않고 멀리 鎭南浦, 仁川, 서울 方面에 미친다."(財務週報)

帝國의 黃昏期에 日本 商人이 韓國 商人을 壓倒하였지만, 이에 가장 굳건히 對應한 商人은 開城商人, 곧 松商이었습니다. 1910年 出刊된 '朝鮮産業紙'에 依하면, '開城 商民은 모두 理財에 밝고 그 運用에 巧妙하며, 各種 物貨는 日本 또는 서울•仁川地方에서 購入하여 四方에 行商하여 利益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日本人은 開城商人을 自國의 代表的인 行商人 近江(おうみ)商人에 比喩했습니다. 當時 開城에 資産 1万원 以上의 商人이 50戶, 1万원 以下의 商人이 203戶나 있었습니다. 1913年 人蔘業에 投入된 固定資金은 180余万원에 達했습니다. 當時 서울市內 高級住宅 價格이 1万원 程度였으니, 開城商人(當時 開城의 布木廛)의 資本力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08年頃 日本 商人은 韓國 商人을 거치지 않은 채 米穀을 賣出하고 또 輸入品을 販賣하여 開城商人의 勢力圈을 顯著히 侵蝕하였습니다. 그러나 '古來의 慣習上 開城商人이 各地에 顧客을 가지고 그 基盤이 멀고 깊기 때문에 一朝一夕에 破壞되지 않을 것은 確實하다'는 報告가 있을 程度였습니다. 松商이 이처럼 外國 商人에 굳건히 對抗할 수 있었던 것은 開港 以前부터 商業을 發達시켜왔기 때문이니다. 高麗에서 朝鮮으로 王朝가 바뀐 後 官職 進出이 困難해진 開城의 엘리트는 일찍부터 商業에 專念하였습니다. 그래서 松商은 商術이 뛰어났고, 四介治簿法 (韓國에서 傳統的으로 使用한 獨特한 簿記法)이란 複式簿記를 일찍부터 使用하였습니다.

開城에는 相當한 家門의 子弟도 有力 商人의 麾下에 使喚으로 들어가 商業을 배웠습니다. 使喚의 우두머리인 首使喚은 7~8年 程度 熱心히 일해 主人의 信任을 얻으면 差人으로 上昇하여 主人을 代身하여 店鋪를 맡거나 他地로 가서 行商業 또는 金融業에 從事했습니다. 開城商人 사이에는 換都中의 仲介를 通해 월 利子 1.5% 以下의 時邊(돈이 必要한 商人에게 빌려주고 一定한 利子를 받아 資本을 增殖하는 것)이라는 信用貸出이 活潑히 이루어졌습니다. 松商은 松房을 通하여 全國的인 商業網을 形成하였고 義州의 中國 貿易과 東來의 日本 貿易에도 活潑히 參與하였습니다.

이들의 節約 精神이 워낙 透徹해 '開城商人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자라지 않을 程度'라고 했습니다. 1920年代 前半에도 '開城商人의 地方 行商 活動은 놀랄 만하여 그 族跡이 全 朝鮮에 미치고 그 數를 正確히 알기 어려워도 2000~3000名으로부터 가장 많을 때에는 1万名 以上에 達하였다'('朝鮮人の商業')고 합니다. 代表的 開城商人은 孫鳳祥 崔益模 孔聖學 等이었습니다. 孫鳳祥은 人蔘밭 (松都 附近의 人蔘밭)을 土臺로 1918年 資本金 20万원의 高麗蔘業株式會社를 設立하였고, 崔益模는 商標 附着 等 革新的인 販賣法을 創案하였습니다. 孔聖學은 家業인 人蔘 밭을 基盤으로 1912年 商業•金融會社인 永信社를 設立하고, 1917年 開城電機株式會社 設立에 參與하여 近代的 企業家가 되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