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謠背景函

浅草しぐれ-笹みどり///韓國에 日本이 公娼制를

bsk5865 2015. 7. 27. 20:01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5.07.27 07:0

 

浅草しぐれ-笹みどり///韓國에 日本이 公娼制를(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7588 


MP3 ダウンロード


浅草しぐれ-笹みどり

作詩 作曲 上野たけし 編曲 竹村次郎


逢えば別れが 悲しいものを
逢えぬ淋しさ 尚更つらい
あなた偲んで 仲見世通り
どこか似たような うしろ影
ひと目逢いたい
夜の浅草 通り雨


うるむネオンに抱かれて眠る
恋の灯よ 言問橋よ
いっそ涙も 思い出さえも
捨ててゆきたい 隅田川
頬にこぼれる
夜の浅草 露しぐれ


いつか忘れる あの人なのに
飲めば未練が 又つのる
ひさご千束 噂に聞けば
今じゃ妻子さえ いるという
肩に冷たい
夜の浅草 みぞれ雨


韓國에 日本이 公娼制를

年末에 內部 衛生局에서 調査한 바 賣淫女의 數效를 대강 들은즉 韓人 賣淫女가 2468名이오 日人 賣淫女가 2830名인데 漢城 內에 第一 많고 그 다음은 慶尙北道 咸鏡南道 慶尙南道 京畿道요 第一 적은 곳은 江原道라더라."(大韓每日申報)

開港 以後 建築勞動者나, 零細商人으로 朝鮮에 온 日本人들은 대개 홑몸이었고 그들을 따라 性賣買 女性들도 함께 건너왔습니다. 日本은 自國의 威信을 생각하여 朝鮮에서 日本人의 性賣買를 公式的으로 禁止하였지만 貸座敷業(料理店에서 性賣買를 爲해 房을 빌려주는 것)을 通해 이뤄지는 隱密한 性賣買가 急增하였습니다. 淸日戰爭 때 日本軍이 駐屯한 龍山 一帶와 軍隊를 따라온 民間人들의 住居地가 된 南山 진고개 一帶에는 料理店을 가장한 淪落業所가 密集하였습니다.

朝鮮에 公認된 集娼村, 卽 公娼이 나타난 것은 開港 初부터 日本人 居留地가 形成된 釜山•仁川•原産에서였습니다. 가장 먼저 1902年에 釜山 富平洞의 峨媚山下 遊廓과 이 遊廓의 成功에 刺戟 받아 仁川 선화동의 敷島(しきしま) 遊廓이 생겼습니다. 1903年에는 元山에 大阪新町(おおさかしんまち)遊廓의 이름을 본뜬 新町 遊廓이 생겼습니다.

1904年 러日戰爭 때 또 한 차례 日本軍이 朝鮮에 大擧 進出하고 그와 함께 民間業者들도 몰리면서 貸座敷業이 好況을 맞이하여 마침내 漢城에도 新町(しんまち) 遊廓이 生겼습니다.

淪落과 遊興의 文化는 러日戰爭 以後 日本人들의 朝鮮 進出이 急增하면서 빠른 速度로 번져갔습니다. 1906年 龍山 桃園洞에 桃山(ももやま) 遊廓(後日의 彌生町 遊廓)이 생겼으며, 1908年에 大邱 八重垣町(やえかきちょう) 遊廓, 1909年에 청진의 성가곤 遊廓과 나남의 이하정 遊廓, 1910年 木浦 竹洞 遊廓과 大田 中洞의 春日亭 10番地 等 日本人 居留地를 中心으로 賣淫은 近代의 코드인 것처럼 全國으로 擴散되었습니다. 隱密하였던 性賣買가 이제 集娼村을 通해 公公然히 이뤄졌습니다.

公娼을 設置하면서 日帝가 내세운 論理는 性賣買를 公的으로 管理함으로써 軍隊 維持, 性病 管理, 附隨的 商業利益, 徵稅 等이 可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性賣買는 集娼村 울타리 내로 制限되지 않았고 密賣淫이 盛行하였습니다. 金 아무개라는 者는 '꽃을 감춘'이란 뜻의 藏花組合所를 만들어 密賣淫女에게 稅를 거두어 내겠다고 請願하였습니다. 新韓民報는 性賣買의 擴散이 日帝의 政策的 意圖라고 非難하였습니다.

"漢城 장안과 各 大 都會處에서는 밤이나 낮을 勿論하고 賣淫女가 길에 널리어 靑年子弟의 소매를 이끌며 눈짓 콧짓으로 꾀어 들여 十錢 五錢에 방을 내고 惡한 病을 傳染하며 虛蕩한 者의 魂을 뽑아 財産을 蕩盡케 하니 이는 우리의 後世 子孫까지 없애고자 함이라 이러한 賣淫女가 白晝大道에 橫行하되 巡檢은 보고서도 못 본 척하니 이는 統監府의 政策인 고로 禁하기는 고사하고 뒤로는 隱密히 保護하는지라.")

1919年 12月 26日字 美國 '시카고트리뷴'紙도 서울發 記事에서 "日本이 朝鮮에서 가장 먼저 韓 日 中 하나는 人種差別的인 淪落街를 만든 것이며 "이런 淪落街는 朝鮮人 男女의 性的 墮落을 爲해 日本이 緻密하게 導入한 것"이라고 날카롭게 指摘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