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어린 시절 진주의 조부모 집을 오가며 자랐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물 동냥 왔다가 소년 구본무와 마주쳤다. 스님은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허, 저기 돈 보따리가 굴러다니네." 부자들로 넘쳐나는 재계에서도 그의 얼굴상은 으뜸으로 쳐줬다.
허영만의 만화 '꼴'에서도 돈이 따라붙는 만석꾼 관상으로 등장한다.
▶스님의 관상풀이대로 구 회장은 평생을 돈 보따리를 끌어안고 살았다. 하지만 일상은 남을 먼저 배려하는 소탈한 에피소드로 넘쳤다. 무조건 20분 전엔 약속 장소에 나가는 습관이 유명했다. 먼저 와 있는 구 회장을 보고 상대방이 황송해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음식점 종업원에겐 만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여주곤 했다. 골프장에 가면 직접 깃대를 잡고 공을 찾아다니며 캐디를 도와주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옳은 일 한 의인(義人)이 나타나면 개인 재산을 털어 도와주었다. LG 의인상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유교적 가풍(家風)을 이어받은 경영자였다. 온화한 가부장 같은 리더십으로 직원들 마음을 샀다.
10년 전 금융 위기 때 그가 내린 지시가 화제였다.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 그는 눈앞의 이익
보다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휴대폰 사업이 거액 적자 냈을 때도 LG전자는 감원 없이 버텼다.
덕분에 그의 회장 취임 후엔 노사 분규가 거의 사라졌다. 직원들 애사심도 유별나다.
투박하지만 끈끈한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그는 평생 책을 딱 한 권 기획해 펴냈다. '한국의 새'라는 조류 도감이다. 그의 탐조(探鳥) 취미는 유명했다. 여의도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틈만 나면 한강변 철새들을 관찰했다. 새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것일까.
그는 바람에 순응해 하늘을 날듯 순리를 좇는 삶의 방식으로 일관했다. 남과 다툴 일을 만들지 않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흔한 비리나 구설수 한번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 지 그랬다.
▶천하의 덕장(德將) 구 회장도 분노를 참지 못한 일이 있었다. IMF 때 강제 '빅딜'로 반도체 사업을 빼앗겼을 때다. 그날 밤 구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일어섰다. 기업인이 존경받지 못 하는 오늘, 정말 옆집 아저씨 같던 재계 총수를 떠나보내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낄 사람이
한 사람의 진면목은 그의 삶이 역사가 된 후에야 보인다고 하더니 구본무 LG 그룹 회장이 그러한 것 같다. 선행과 일화가 꼬리를 물고 회자됐다. 고인이 몸담았던 경제계뿐만 아니라 정계, 문화계, 체육계에까지도 미담이 줄을 잇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권오용 한국CCO클럽 부회장.
그런데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쉽게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제2, 제3의 구본무가 나올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고인의 뜻을 오래 기리는 진정한 길이 될 것이다.
구회장은 정경유착을 싫어했다. 차떼기 사건에 연루되자 TV에서 방송되던 “사랑해요, LG” 광고를 전면 중단시켰다고 한다. 주변에 낯을 들 수가 없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국정농단 국회청문회에서는 기업이 정경유착을 안 해도 되게 국회가 법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무엇보다 국회에서 그분의 뜻을 기리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면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구회장을 추모한다고 했으니 여야공동으로 정경유착방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에 부당한 청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입법안이 발의되기를 희망한다.
구 회장은 같은 자리에서 미국의 헤리티지재단같은 연구소를 제안했다. 전경련은 친목단체로 남고 나라의 비전을 제시하는 씽크탱크를 만들자고 했다. 그런데 헤리티지재단은 몇몇 재력가나 정치인에 의존해 존재하는 연구소가 아니다.
60만명의 소액후원자가 십시일반으로 기부를 해서 운용하는 곳이다. 2016년도 8100만 달러의 예산중 기업지원금은 4%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용비판도 없고 이념논쟁에도 자유로운 순수한 씽크탱크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누가 제안을 하든 우리나라도 이런 독립된 민간연구소 하나쯤은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왕이면 비통한 마음으로 고인을 추모했던 조문객 일동으로 연구소 설립을 발의해주면 어떨까. 조문을 못했던 나도 기꺼이 동참할 영광을 가졌으면 한다.
재계도 고인의 유지를 받들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재산을 둘러 싼 다툼부터 없었으면 한다. LG는 50년을 동업해 온 GS그룹을 떼어 낼 때나, 형제간의 계열분리가 이뤄질 때나 단 한번의 분규도 없었다.
“우리가 조금 손해 보면 되잖아요” 구회장의 이 한마디로 모든 분규가 잠재워졌다. 그렇다고 손해만 볼 요량도 아니었던 것 같다. GS, LS, LIG 등을 분가시키고도 그는 재임동안 그룹의 매출을 30조원에서 160조원으로 5배 이상 키웠다.
해외에서 특히 약진했다. LG의 해외매출은 같은기간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이상 커졌다. 안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밖에서 크는 방법을 안 것이다. 이런 기업인이 많아야 기업을 둘러 싼 오해와 편견이 사라지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만들어진다.
구회장은 상식을 실천한 사회운동가였다. 지난해 빗나간 총탄에 아들을 잃고도 “어느 병사가 총을 쐈는지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고 한 아버지가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구회장이 사재로 그 아버지에게 사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감동했다. 바로 LG 그룹의 지인에게 연락했다, 정말 좋은 회장을 모시고 일한다며.
그는 국가나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들에게 기업의 보답은 사회적 책임이라고 했다. 구회장 자체가 의인이었으니 LG의인상을 구본무 의인상으로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 그는 우리 사회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영웅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준 조용한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특히 시간 약속은 더 했다. 여의도에 있는 전경련에서 회장단회의 등을 하면 항상 10분전에는 도착했다. 왜 이리 일찍 오시냐고 물으니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어서요” 하셨다.
자신이 손해 보는 시간만큼 그는 남에게 더 많은 배려와 정성을 베푼 셈이다. 그래서 LG에는 노사분규가 없다. 노사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회장부터 약속을 지킨다는 믿음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고인은 무엇보다 기다림의 미학을 일깨워줬다. LG야구단 박물관에는 1993년에 구회장이 오끼나와에서 사온 특산 소주 「아와모리」가 있다. 우승을 기다리며 25년째 봉인이 되어 있다. 다음 우승 때 열자고 했는데 1993년 이후 아직까지 LG야구단은 우승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 그 병의 봉인을 뗄 때의 감격과 환희를 상상하면 나도 전율이 온다.
디스플레이. 2차전지, 통신 등은 그가 기다림의 경영철학으로 일으킨 사업들이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일군 마곡단지에서 기다림의 미학을 일깨우는 탁월한 성과가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찰나에 집착하는 지금의 세태에 기다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구본무 회장은 남에게 번거로움을 주기 싫다며 작은 장례식을 솔선했다. 그러나 내 마음으로는 어떤 장례식보다 큰 장례식이었다.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요히 가셨다. 그래도 추모의 물결은 큰 숲을 이루고 만인의 가슴을 적셨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봄길> 정호승'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만물상] 인간 구본무](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805/20/2018052002972_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