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가비 | | 조회 330 |추천 1 | 2015.04.24. 07:16 http://cafe.daum.net/foliagw/77iU/23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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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황금심 작사 이서구 작곡 전오승
一 구중궁궐 긴 마루에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희빈아 님 고이 든 그날 밤이 차마 그려 치마폭에 목매는가
二 대전마마 뫼시던 날에 칠보단장 화사하던 장희빈아 버림받는 푸른 한에 흐느껴서 화관마저 떨리는가
明成皇后 생몰년도: 1851년(哲宗 2)-1895년(高宗 32) 활동분야: 왕비 다른 이름; 민비(閔妃)
생애와 업적 1866년(고종 3) 3월 20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성대한 왕비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다. 만 열네 살의 이 소녀가 훗날 자신과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흥선대원군은 흐뭇한 미소로 아들과 며느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흥선대원군 자신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 뽑은 며느리였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흥선대원군이었기에,아버지와 친형제가 없는 민씨 소녀를 선택했다. 양 오라비 민승호가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처남이니 충분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게다가 이 소녀를 추천한 자신의 부인의 말대로 “왕비로서 부끄럽지 않은 용모와 자태를 가졌으며,예의범절 등을 충분히 교육받았고,학문은 어느 명문가의 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기대처럼 궁궐에 들어온 명성황후는 왕실의 어른들을 모시고 고종을 보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혼인한지 다섯 해가 되도록 자손을 얻지 못했다. 결혼 초기 고종은 명성황후를 외면하고 후궁 이씨에게서 완화군을 얻었다. 손자를 기다리던 흥선대원군은 완화군을 총애하며 세자로 책봉하려 했고,이로 인해 명성황후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1871년(고종8) 명성황후도 첫 왕자를 출산하지만 아이는 선천성 기형으로 5일 만에 죽고 말았다. 그 원인이 흥선대원군이 보낸 산삼 때문이라 믿은 명성황후가 그때부터 흥선대원군에게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874년 두 번째 왕자를 출산해 그가 고종의 뒤를 잇게 되지만,이후 출산한 2남 1녀가 모두 1년을 넘기지 못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세자도 병약했다. 명성황후는 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명산대천에 수만 냥의 거금을 써서 기도를 드리고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훗날 왕실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비난을 불러온다.
명성황후는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을 때조차 밤새도록 책을 놓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공부를 열심히 했고,총명했다. 전통적인 학문뿐 아니라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동향에도 관심이 많았다.그런 그의 눈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매우 위험한 판단요로 보였다 또한 어느덧 고종도 스무 살이 넘어 직접 정치를 하고자 했지만,흥선대원군의 권력욕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아들이 직접 아버지를 권좌에서 밀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성황후는 우선 민씨 처족들을 중심으로 흥선대원군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모아 고종의 지지기반을 마련하고 서원철폐로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이 많은 유생들을 동원해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밀어냈다.
이후 명성황후는 고종과 끝까지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는 참모이자,민씨 척족의 구심점이 되어 정국의 전면에 나선다. 고종은 이러한 명성황후에 대해“타고난 예지와 날카로운 의리로 어려울 때 자신을 살뜰히 도와주었고,근심거리가 있으면 반드시 대책을 세워 풀어주었으며,특히 외국과 교섭하는 문제에서 황후가 권고한 수원정책은 외국 사람들도 감복했을 정도” 라며 극찬했다.
권력을 장악한 고종과 명성황후는 개화정책을 펼쳤다.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를 우의정에 등용했으며,동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삼군부를 폐지했다. 신사유람단(神士遊覽團)과 영선사(領選使)를 일본관청에 파견해 새로운 문물을 학습케 했으며,이들을통해 대미 수교의 주선을 요청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개화의 물결은 임오군란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처음에는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발생한 폭동이 흥선대원군의 세력과 만나 궁궐에 난입하는 쿠데타로 발전하자 명성황후는 급히 궁중을 탈출해 충주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고,정국을 다시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난리 중에 살해되었다고 국상을 반포해버렸다. 황후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다시 대궐에 돌아올 수 없도록 정치적 사망 선고를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군란 중에 입은 일본대사관의 피해를 보상하고 앞으로 있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라는 일본군의 무력시위와,이를 견제하기 위한 청군의 파견으로 청과 일본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흥선대원군이 강경 대응을 고수하자 청은 흥선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해 유폐시켜버렸다. 지금까지 임오군란 후 청군의 개입이 명성황후의 요청이었던 것으로 전해져 명성황후를 친청사대 주의자로 낙인 찍는 근거로 제시되어 왔지만,최근의 여러 연구들은 청군의 파병은 조선에 대한 청의 속방화정책 차원에서 청이 결정한 것이지 명성황후나 고종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납치도 파병 전에 이미 세워진 청의 결정이었다.
어쨌든 흥선대원군의 납치로 명성황후는 환궁했고,커다란 위기를 경험했던 명성황후는 더욱 민씨 일족에 의존하며 적극적으로 친위 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를 신뢰하던 고종과 달리 명성황후는 개화도 민영익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 세력 들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으로 김윤식 • 김홍집 등 친정 세력이 득세한 반면 고종과 명성황후는 정국의 주도권을 청에 빼앗겼다. 갑신정변마저 청국이 진압한 뒤에는 원세개가 조선의 상왕처럼 군림했다.이 무렵 명성황후는 외교적으로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1885년에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독일인 외교 고문인 멸렌도르프(Mbllendorff, Paul G.von)를 일본에 파견해 영국과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접촉해 청국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원세개가 흥선대원군을 환국시키는 등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압력을 가하며 반발하고,러시아에 적극적으로 조선을 지원할 여유가 없어 무산되었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하려 하자 명성황후는 다시 러시안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에 맞서려다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만다. 일본이 조선 침략이라는 자신들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판단하여 궁궐난입이라는 무리수를 두며 제거했다는 것은 명성황후가 당시 정치에서 차지했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5시 무렵, 전날 밤 미리 준비해두었던 긴 사다리를 통해 광화문 왼쪽 성벽을 넘은 선발대가 경복궁 정문을 열자 대원군이 탄 가마와 함께 일본수비대,조선 훈련대,그리고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돌진해 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은 흥선대원군의 쿠데타로 위장하기 위한 일본군의 협박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동원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조선 훈련대는 단지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쿠데티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고 참가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 신문들은 조선 왕비의 시해 사건이 대궐 내에서 훈련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야기된 것처럼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날 새벽 왕비가 일본인들의 칼에 살해되어 사체가 정원에서 불태워진 것은 분명하지만,어떻게 목숨을 잃었고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하는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당시 왕비 시해 범들은 모두 각본을 깐 것처럼 서로 엇갈린 말로 사건을 왜곡하고 은폐했다.
왕비를 시해한 일본인들은 국왕과 왕세자에게 한 장의 문서를 내밀었다. 왕비의 폐비를 강요하는 문서였다. 이렇게 폐위된 명성황후는 그 해 10월 10일 복위되었고,1897년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고종 황제는 일본에 의해 폐위당한 뒤 1919년 갑자기 사망했고,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35년간 암흑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평 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이미지를 악의적으로 왜곡시켰다. 명성황후는 총명하지만 부덕한 여성으로,고종은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로 왜곡하고,그들에게 망국의 책임을 떠넘겼다. 이러한 평가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되다가,1990년대 후반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들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 침탈에 저항하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전사,‘러시아•청 • 일본 등 여러 외국을 혀끝으로 농락한 외교가라는 새로운 평가들에 대해 이 또한 지나친 미화가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명성황후가 그렇듯 애써 지키려 한 것은 국권이 아니라 왕권,곧 고종과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일족들의 안위였다는 비난과,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비난은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있다.
한편• 1890년대 한국을 여행하면서 여러 차례 명성황후를 만난 영국 여행가 비숍(Bishop, Isabella B) 여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알현시마다 나는 왕후의 우아함과 매혹적 몸가짐,사려 갚은 친절,보기 드문 지성과 박력,그리고 통역관의 중개를 통한 것이지만 왕후의 놀랄 만한 대화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왕후의 비범한 정치적 영향력 또는 왕과 기타 많은 문제에 관해 조정하는 수단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사유람단 876년에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뒤, 정부는 박정양 •염세영(嚴世永). 강문형(姜文醫).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을 정식 위원으로 하고 그 밑에 이들을 보조하는 수원(隨員)과 통사(通事). 종인(從人) 각 1명씩을 대동하게 하여 평균 5명으로 1반을 편성한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신사유람단은 약 4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정치 • 경제 • 문화 • 각 부문을 시찰하고 귀국했다.
영신사 1881년(고종 18) 신식 무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 38명을 선발하여, 김윤식이 그들을 인솔하고 청나라 텐진 기기창에서 무기제조 기술을 배웠다.1882년 임오군란 소식을 듣고, 반년 남짓의 기술 습득을 마친 뒤 귀국하여 서울 삼청동에 한국 최초의 신식 무기 제조창인 기기창을 설립하는데 큰 몫을 했다.
거문도사건 1885년 3월 영국군 함세 척이 거문도를 습격해 불법 점령한 사건. 영국공사는 러시아의 불법 점령에 대비해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887년 2월 27일이었다. 러시아의 남하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철수한 것이다.
원세개 청나라 이홍장의 명을 받아 조선에 머물며 내정 • 외교를 간섭하고 일본에 대항하던 중국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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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成者 黃圭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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