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대표적 보병 훈련 기지인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육군보병박물관에 가면 한국 노병(老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6·25전쟁 영웅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의 육성(肉聲)이다. 미군은 2009년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백선엽을 포트베닝으로 초청해 6·25전쟁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녹음했다. 보병재단 회장이 직접 긴 편지를 보내 "역사적 전투 경험을 공유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성사된 것이다. 박물관은 이 녹음을 영구 보존한다고 한다.
▶미군은 백선엽을 '살아있는 전설'이자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예우한다.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함께 마지막 전선(戰線)을 지켜낸 백선엽에 대해 미군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장교" "최상의 야전 지휘관"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주한 미군이 백수(白壽·한국 나이 99세)를 맞은 백선엽을 위한 파티를 연 자리에서 군인 출신인 해리스 주한 대사는 무릎을 꿇고 노병의 두 손을 맞잡았다. 미군의 존경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이 전쟁 영웅이 정작 한국에서는 틈만 나면 폄훼와 매도 대상이 된다. 좌파 세력은 그가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것만 부각해 '독립군 토벌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백선엽이 회고록에서 "당시 중공 팔로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 했다"고 했지만 이런 해명은 외면한다. 친일진상조사위는 백선엽 이름을 친일 명단에 올렸고, 2012년 민주통합당 청년 비례대표는 그를 '민족 반역자'라고 불렀다.
▶이 정권 들어서도 육사가 6·25 당시 백선엽의 활약을 그린 웹툰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한 일이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 야당 대표가 백선엽을 찾아간 것을 계기로 백선엽 깎아내리기가 본격화했다.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 "북한 미사일은 미군 기지 공격용일 뿐"이라고 변호했던 광복회장은 연일 "백선엽은 철저한 토착 왜구"라며 거품을 물고, 여당 의원은 "윤봉길 의사가 분통해할 일"이라고 거들었다. 김일성 훈장을 받은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인 것처럼 추켜세운 대통령의 연설을 다시 듣는 것 같다.
▶몇 년 전 향군회장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교육받고 일본 체제에서 근무한 것을 탓한다면 백 장군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라고 했다. 6·25 때 대한민국에 총구를 겨눴던 인사는 칭송하고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쏘라"며 선봉에 섰던 호국 영웅에겐 침을 뱉는다. 전도된 의식을 개탄한다.
전쟁인가 평화인가?
나는 여든아홉이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마다 또렷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6.25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겪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한 기억이다. 평화가 일상이 된 지 오래이다 보니, 사람들 모두 전쟁의 공포에 무뎌진 것 같다.
나의 사랑하는 손주들을 비롯한 후손들이 결코 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전쟁의 상처는 우리 세대에서 끝나야만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늘 대한민국이 평화롭기를 기도한다.
- 한준식의《여든아홉이 되어서야 이 이야기를 꺼냅니다》중에서 -
* 오늘 또 다시 '6월25일'이 돌아왔습니다. 참혹했던 6.25 전쟁에서 살아남아, 대한민국이 평화롭기를 바라는 한 노병사의 기도가 절절하게 들립니다. 전쟁도 평화도 사람이 만드는 것입니다. 후손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전쟁인가 평화인가? 답은 명백합니다.
전우여!고이 잠드소서...
6.25 전쟁 69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오전 경기 수원시 팔달구 현충탑 위패실에서 6.25참전용사가 헌화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