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 출신 父子가 만든 「추억의 戰場記」 仁川학도병 6·25참전사 『우리는 사춘기를 戰線에서 보냈다』 열여섯 살에 입대, 山戰水戰을 다 겪고 스무 살에 제대한 李慶鍾씨는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곧 「바보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울분으로 바뀌는 걸 체험한다. 아버지의 이 恨을 풀기 위해서 아들 李揆元씨는 仁川 학도병 歷史를 발굴하기 시작, 「소년학도병 3000명의 英雄傳」을 써내려가고 있다
鄭潤載 月刊朝鮮 제작출판팀 기자
차 레 아버지가 아들에게 치과의사 長男의 도움 李啓松을 의용대장에 선출 南下 5000명의 운명 드라마틱한 南下, 입대, 전장투입 과정 自生的, 自發的 조직 李慶鍾씨의 6·25 사춘기를 戰場에서 보내다 꼬리에 꼬리를 문 자료 발굴 사업 그들은 仁川의 노른자위였다 인천 학도의용대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1995년 겨울,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에 사는 李慶鍾(이경종·67·치과의원 원장)씨는 군대 시절 얻은 허리병이 도져 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李씨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9개월 동안 치료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李慶鍾씨는 신문 한 모퉁이에서 「6·25 참전용사 증서」를 발급한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그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아픈 허리를 이끌고 병무청을 찾았다. 병무청에서 병적증명서를 발급받고 국가보훈처로 가서 이를 제출했다. 그리고는 국가보훈처에서 「6·25 참전용사 증서」를 받았다. 李慶鍾씨는 그러나 왠지 허탈했다. 자신의 젊음을 바친 인천 학도의용대와 참전의 흔적이 겨우 종이 한 장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답답함과 허무함을 지울 수 없었다. 李씨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열여섯 살에 형을 따라 인천 학도의용대에 들어갔습니다. 스무 살에 제대해서 고향에 돌아와 보니 그때까지 부모님 밑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는 친구들이 꽤 있더군요. 가정 형편 때문에 복학하지 못해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나라를 지켰다」는 생각에 우쭐해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창 공부할 시기에 군대 생활을 했다는 것이 참으로 「바보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학도병에 지원하고 그로 인해 군대 생활을 했지만 나라에서 해 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섭섭했지요. 그게 恨(한)으로 남아 가슴의 응어리가 되었습니다. 「6·25 참전용사 증서」를 받고 나니 오히려 더 허탈해진 겁니다』
1996년 가을 어느 날 李慶鍾씨는 장남인 李揆元(이규원·39·치과의원 원장)씨를 불러 앉히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이러다가 「역사 속에 묻혀진 인천학도병의 활동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과 함께 戰死(전사)한 인천학도병 출신 동료 전우들에 대한 죄스러움이 李慶鍾씨의 가슴 한켠에 자리잡은 것이다. 李씨는 장남에게 6·25 참전용사 증서를 보여 주며 학도의용대 시절의 南下(남하) 과정과 6·25 때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늦은 밤까지 아들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치과의사 長男의 도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李揆元씨는 그 자리에서 『인천 학도의용대의 행적을 밝히는 작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李慶鍾씨는 아들의 말이 기특하긴 했지만 워낙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비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의 결심에 반대했다. 하지만 석 달 후 李揆元씨는 「인천 학도의용대의 활동과 6·25 참전사」라는 제목의 「편찬계획서」를 들고 아버지를 찾았다.
李씨는 결국 아들의 결정을 허락했고 이듬해인 1997년 2월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라는 단체가 출범한다. 李慶鍾씨는 자료조사를 주로 하는 편찬위원을, 치과 의원을 운영하며 자금을 지원하는 李揆元씨는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李씨의 차남인 이용훈(35)씨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6·25가 나던 해 李慶鍾씨는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학교(당시 6년제) 3학년에 재학중인 만 16세의 소년이었다. 전쟁 발발 후 인천이 함락되자 가족과 함께 피란을 떠났던 李慶鍾씨는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15일 인천이 수복되면서 집으로 돌아와 인천 학도의용대에 지원한다.
인천 학도의용대는 6·25 발발 후 인천지역 學聯(학련) 출신 학생들과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만든 조직이다. 여기에서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가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인천 학도의용대의 탄생과 활동을 再구성해 보기로 한다.
李啓松을 의용대장에 선출
1950년 6월26일 저녁, 인천지역의 學聯 출신 학생들과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李啓松(이계송)의 집에 모인다. 당시 李啓松은 學聯 경기도 연맹위원장과 인천상업학교 학도호국대 연대장을 지낸 고려대 2학년 학생이었다. 이 자리에는 인천 學聯 출신인 鄭國老(정국로)를 비롯하여 朴熙珣(박희순), 鄭然玉(정연옥), 成孝慶(성효경), 李基觀(이기관), 廉相建(염상건) 등 10代 후반에서 20代 초반의 학생 4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날 「護國(호국)」을 결의하고 全仁川學徒義勇隊(전인천 학도의용대)를 조직, 李啓松을 의용대장으로 선출한다. 全인천 학도의용대는 1950년 6월27일 인천시 중구 인현동 해군 인천헌병대에 찾아가 총기를 지급받은 뒤 시내 주요 관공서를 경비하며 치안을 담당한다.
6월28일 인천지역 경찰 전원이 수원으로 철수해 인천지역은 치안공백 상태에 빠진다. 이후 국군의 결사적인 死守(사수)로 인민군의 渡江(도강)이 지체되고 인천의 좌익이 활동을 재개한다는 정보에 따라 6월30일 인천지역에 경찰력이 다시 투입된다. 全인천 학도의용대(이하 인천 학도의용대)는 경찰이 공백 상태인 인천지역의 치안을 이틀 동안 맡은 셈이다.
하지만 1950년 7월4일 인천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된다.
인천 학도의용대 대원 대부분은 북한군의 인천 점령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이후 3개월여 동안 개별적인 피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대원 중에는 행정부를 따라 남하하여 해군과 해병대에 입대, 현역으로 참전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15일 인천이 다시 수복되자 흩어졌던 인천 학도의용대 대원들은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다. 李啓松을 중심으로 조직원이 다시 모여지고 이들은 「대한학도의용대 경기도본부」의 발대식을 인천 제1공회당(現 인성여고 체육관)에서 개최한다. 당시 대원수는 총 3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천 학도의용대(경기도본부)의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각각 李啓松과 鄭大衍(정대연)이 맡았다.
경기도본부는 現 인천여고 앞 한 양조장에 본부를 두고 인천 각 지역에 支隊(지대)와 동별 分隊(분대)를 두었다. 주된 임무는 시민 계몽과 부역자 색출, 치안유지, 피란민 안내 활동, 현역입대 주선 등이었다.
南下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경기도본부 대원들은 1950년 12월18일 인천 「축현국민학교」에 집결한다. 서울이 다시 점령 당한 1·4후퇴 직전이다. 현역병으로 입대하기 위한 참전 출발식을 거행하고 南下(남하) 행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이날 여학생 70여 명을 포함한 2000여 명의 학도병들이 본격적으로 南下하기 시작했다.
이날 南下 대열에 참여한 대원중에 李慶鍾씨가 끼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李慶鍾씨는 『너는 나이가 어리니까 집에 남아 있다가 상황이 더 어려워지면 나하고 같이 피란가자』는 모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시 만 18세이던 형 琦鍾(기종)씨를 따라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이가 어려 잘은 몰랐지만 「형이나 선배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믿음 때문이었다.
1950년 12월18일 오전 10시, 축현국민학교에는 인천 학도의용대(경기도본부) 대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에 이르러 대원, 가족, 시민을 포함해 5000여 명의 인원이 축현국민학교에 집결했다.
5000명의 운명
다음은 이날 南下 행군에 참여한 어느 대원의 회고담이다. 다소 길지만 全文을 인용한다. 문법적으로 어색한 부분은 필자가 약간 수정을 가했다. 「1950년 12·18(1·4 후퇴) 南下로부터 군입대까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950년 12월18일 아침 10시부터 인천 학도의용대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에는 대원, 가족, 시민을 합쳐 약 5000명이 축현초등학교를 가득 메웠다. 우리는 그 저녁 무렵에 가족과 친구들과 작별하면서 군악대의 주악에 맞추어 축현 역전을 거쳐 도원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구월동을 지날 무렵에는 해가 져서 어두웠고 온종일 내린 눈으로 길은 온통 미끄러워 행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던 기억이 난다.
밤새 행군해서 도착한 곳이 안양이었다. 그날은 안양의 기관에서 배치해 준 民家(민가)에서 새벽잠을 자고 낮에 다시 행군하여 수원에 도착하여 수원역 근처 여관 등에서 2∼3일 머물렀다가 철도 화물차 편으로 南下를 시작하였다. 철도 화물칸은 이미 서울서부터 만원이라 우리는 대부분 화물차 지붕에서 며칠 몇밤을 지내면서 일부는 대구에서 마산으로 직행하였으며 일부는 삼랑진에서 마산으로 갔다.
新마산 역전 부근에서 철도 관사 등 정해 준 숙소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해병대 신병모집이 있었는데 그 모집에 600여 명이 진해 해병교육대 6기로 入隊(입대)하였다. 나머지 1300여 명은 통영으로 가 그곳 충렬초등학교에 수용되었다. 수용중 李啓松 연대장, 鄭大衍 부연대장은 대구 육군 본부로 찾아가 현재 인천 학도의용대의 실상을 보고하자 육본측에서 부산 육군제2훈련소(現 부산진초등학교)에 입소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 뒤 우리 인천 학도의용대원들은 통영에서 배를 타고 부산 제2훈련소에 입소하여 3주 간의 훈련을 받고 024 군번(024로 시작되는 군번-필자 注)으로 현역병이 되었다.
그중 500여 명은 부산 육군통신학교에 入校(입교)하여 有線(유선)교육 4주와 無線(무선)교육 8주 등 총 13週의 교육을 받은 후 각 부대로 배치되었다. 또한 800여 명은 일반 병과와 보병부대에 배치되어 정식군인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때 인천 학도의용대 군악대와 여학생 대원 95명이 인천에서 「윈저호」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군악대 25명은 부산시 동래에 있는 육군종?朗閨? 군악대의 창설 멤버로 현지 入隊하였으며 여학생 대원들은 부산육군통신학교 신봉순 대위의 보호 하에 행정보조요원 등으로 근무하다가 인천이 수복된 후에 전원이 귀향 조치되었다>
드라마틱한 南下, 입대, 전장투입 과정
이후 인천 학도병의 南下는 수륙 양로를 이용, 총 4회에 걸쳐 이어지게 된다. 4차에 걸친 南下 경로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차 南下―1950년 12월18일 인천 축현초등학교에서 출발한 연대 주력의 인솔책임자는 李啓松 인천 학도의용대 연대장. 李연대장은 3000여 명에 이르는 주력부대를 마산과 부산까지 인솔한다. 인솔 도중 육군본부에서 육군 중위 계급을 제시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鄭大衍 부연대장과 함께 인솔의 책임을 다한다. 李啓松 연대장은 부산 제2훈련소에서 대원들과 함께 입소한다. 이후 통신병으로 복무하였고 7년여의 軍생활을 사병으로 마치고 일등상사로 제대한다.
▲2차 南下―대부분 인천상업학교 밴드부원(2학년∼6학년)으로 구성된 군악대원 25명과 여학생 대원 95명은 인천항에서 「윈저호」라는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한다. 3박4일 동안 항해한 후 부산항에 도착했다. 당시 인천 학도의용연대 군악대장은 인천상업학교 졸업생이었던 최경환이었다.
▲3차 南下―1950년 12월25일 인천여자중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잔여 대원 130명이 마산으로 이동하였다. 인솔대장은 인천공업학교 졸업생이자 서울대 약대에 재학중이던 최재경 대장. 최재경 대장은 M1 소총을 지급받았고 징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솔증까지 휴대하였다. 영등포까지 도로로 이동한 후 화차를 배정받아(화차 지붕 위) 부산까지 南下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후 배 두 척을 징발하여 통영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마산으로 집결, 인천 학도의용대와 합류한다.
▲4차 南下―당시 국민대 재학생이었던 박남훈 강화 南支隊長은 강화도 길상면을 중심으로 활동한 학도의용대의 리더였다. 1950년 12월18일 강화南지대는 인천 학도의용대 연대본부와 연락이 지연되어 南下 시기를 놓치고 만다. 12월22일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서 박남훈 지대장의 인솔 아래 72명의 대원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배편을 이용, 이날 해질 무렵에서야 김포군 대명리에 도착한 강화南지대 대원들은 인천까지 육로로 이동한다. 12월25일 인천에서 300t급 수송선 「이천호」에 승선한 대원들은 부산으로 이동, 다시 통영, 마산을 거쳐 인천 학도의용대와 합류한다.
自生的, 自發的 조직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천 학도의용대의 南下가 결코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천 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는 『수집한 제보와 자료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내린 결론』이라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천 학도의용대가 1950년 12월18일 南下하게 된 동기는 우발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戰時下(전시하)에서 국방부 정훈국 인천파견대와 인천 학도의용대가 합의하여 南下하기로 결정하였으며, 南下 시기에 대해서는 학도의용대 내부에서 결정한 것이었다』
실제 인천 학도의용대의 南下에는 현역군인인 嚴熙鐵(엄희철·육사8기) 대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8년 임관한 嚴熙鐵 대위는 9·15 인천 수복 이후 국방부 정훈국 인천파견대장으로 부임하여 국방부와 인천 학도의용대의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인천 학도의용대의 활동에 관여한 유일한 현역 군인이었다.
학생들로만 구성되었지만 인천 학도의용대는 짜임새 있는 조직력을 갖춘 조직이었다. 확인된 직책들만 나열해 보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주요 직책과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연대장 李啓松, 부연대장 鄭大衍, 총무위원장 鄭然玉, 조직위원장 李基觀, 선전위원장 劉福連(유복련), 감찰위원장 廉相建」
인천 학도의용대는 또한 각 支隊별로 편제되었다. 북구지대, 동구지대, 서구지대, 영종지대, 계양지대, 강화지대, 강화南지대, 해성지대 등의 지대를 두었고 그 예하에 동별 분대를 편성했다. 인천상업학교 밴드부가 중심이 되어 군악대도 조직되었다.
당시 대원수가 3000명에 이르렀던 인천 학도의용대는 대원의 상당수가 현역병으로 지원했다. 해병대에 입대한 대원의 수가 600여 명에 달했고 통신병 500여 명, 일반 군부대 800여 명, 군악대 25명 등이 마산과 부산에서 입대했다. 여학생 대원 95명도 부산의 통신대에서 근무했다. 입대가 확인된 대원의 수는 약 2000여 명에 이른다.
李慶鍾씨의 6·25
전쟁과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李慶鍾씨는 나이 어린 한 개인일 뿐이었고 그도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李씨가 다니던 인천상업학교는 6·25 발발 직후 휴교 상태에 들어간다. 인천이 북한에 의해 점령되면서 李씨는 「누님」이 있는 용유도 덕교리로 피신한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나이 어린 학생들까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잡아가는 형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李慶鍾씨는 『용유도에서 9·15 인천수복작전 때 무차별로 포격하는 연합군의 함포사격을 밤새워 보았다』고 회고했다.
인천이 수복되자 돛배를 얻어 타고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던 李慶鍾씨는 『당시 인천의 치안이 엉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학교는 여전히 휴교 상태였고 토착 좌익세력과 부역자 색출작업에 학생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李씨는 『이것이 당시 시국이었고 현실이었다』고 덧붙인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李慶鍾씨는 인천에 학도의용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인천 학도의용대 동구지대에 지원한 李씨는 얼마 후 지대를 옮겨 해성지대(해성중학교)에서 활동하게 된다. 인민군 의용대 입대를 피하기 위해 피신까지 한 李씨가 인천 학도의용대에 지원한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다.
학도의용대에서 활동중이던 1950년 12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져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李씨는 인천 학도의용대를 따라나서겠다고 결심했고 이를 만류하던 어머니에게 고집을 부렸다. 어쩔 수 없었던 어머니는 李씨에게 군복을 사 입히고 「그때 돈으로 6000원」을 쥐어 주었다.
인천 학도의용대 1차 南下에 합류한 李慶鍾씨는 열차로 이동하거나 도보로 행군하면서 삼랑진에 도착한다. 삼랑진에서 마산으로 이동한 李씨는 그곳에서 해병대에 지원했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퇴짜를 맞고 통영 방위군 수용소에 입소한다. 수용소에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여 육군 제2훈련소에 입소한 李씨는 신병 교육을 받은 후 제2훈련소 2대대에 근무하게 된다.
사춘기를 戰場에서 보내다
얼마 후 대대 근처에 육군하사관 교육대가 생기면서 李慶鍾씨는 1951년 3월 「對전차 로켓포 교육담당 조교」로 전속명령을 받는다. 육군하사관 교육대는 최전방에서 전투중인 고참 하사관들에게 최신 무기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는 곳이었다.
육군 하사관 교육대에 배치되자마자 李慶鍾씨는 사고를 당했다. 1951년 3월 로켓포 발사 교육장 현장에서 포탄 과녁을 설치하던 중 무너지는 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된 것이다. 李씨는 척추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현재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치료를 마치고 李씨는 김해 공병학교에 입교, 3週 동안 교육을 받았다. 이후 강원도 수도사단에 배치되어 향로봉 전투, 금화지구 전투, 지리산 토벌작전 등에 참전했다.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긴」 李慶鍾씨는 1954년 12월, 만 4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남들이 군대에 입대할 시기에 제대한 셈이지만 자신의 꽃다운 사춘기 시절을 고스란히 戰場(전장)에 바쳤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李慶鍾씨는 『지금은 停戰(정전)이 아닌 休戰(휴전) 상태』라며 『북한이 노리는 건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해서 쳐들어오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전쟁의 상흔을 아우르는 방향에 대한 지혜의 一端(일단)을 보였다. 그가 말하는 것은 올바르고 정확한 史實(사실)의 정립이었다.
『저야 전쟁터에 나가서 총 한 방 안 맞고 살아서 돌아왔지만 인천 학도의용대 출신의 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戰死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인천 학도의용대에 대해서는 신문에 한 번 난 일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한 맺히고 가슴을 칠 일입니까.
이 일(「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필자 注)을 하면서 옛 전우들의 이야기와 근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戰死한 전우의 소식을 듣고는 가슴이 복받치기도 했고 살아 있는 전우와 만났을 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이제 저는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을 역사 속에 파묻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자료 발굴 사업
李慶鍾씨의 말대로 인천 학도의용대 출신 가운데 많은 수가 부상을 당하거나 戰死했다.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 파악한 수만 2001년 3월 현재 106명이다. 인천 학도의용대 출신 부상자나 戰死者, 또는 이들의 참전사를 밝히는 일은 그야말로 「발로 뛰는 작업」이었다. 일례를 들어본다.
李慶鍾씨가 밝히는 「편찬 뒷이야기」에 따르면 『인천 학도의용대 관련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嚴熙鐵 대위」라는 이름이 자주 나왔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嚴熙鐵 대위는 국방부 정훈국 인천파견대장으로 부임하여 국방부와 인천 학도의용대의 연락책임자로 활동한 현역 장교였다.
李慶鍾씨는 嚴熙鐵 대위가 인천 학도의용대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아내고 수소문에 나섰다. 하지만 이름 석자만 가지고 사람을 찾기에는 너무나 막연했다. 李씨는 육군본부 민원실 병적관리반에 전화를 걸어 嚴대위의 소재를 문의했다. 육군본부는 嚴대위의 군번과 전역 사항을 답변해 주었지만 소재를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하는 수 없이 李씨는 모 기관 민원실에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고 그곳에서 嚴대위의 소재를 알아낼 수 있었다. 李씨는 장남과 함께 전북 김제까지 찾아가 嚴대위의 증언을 녹취하는 데 성공한다.
李慶鍾씨는 관련자의 증언을 통해 해병대 심볼 마크를 고안한 당사자가 인천 학도의용대 출신이라는 것도 밝혀내었다. 그 주인공은 인천중학교 5학년 재학時에 인천 학도의용대 북구지대에서 활동하다가 해병대 6기로 지원, 입대한 이흥주씨다(후에 그는 중사로 전역한 후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다). 「편찬위원회」가 조사한 바를 바탕으로 再구성해 보면 그 전말은 이렇다.
<해병대에 입대한 이흥주 대원은 1951년 4월 해병 간부후보생을 양성하기 위한 해병학교가 진해에 설립되자 해병학교 교수부에 전속되었다. 마침 해병학교의 심볼 마크 현상 공모가 있었고 이흥주 대원도 작품을 출품했다. 응모에 참여한 수백여 편의 작품 중에 당시 해병대 사령부 김성은 참모장은 이흥주 대원의 작품을 선정했다. 김성은 참모장은 이흥주 대원의 작품이 해병학교에 국한되는 것보다는 해병대 전체를 상징하는 심볼 마크에 더 적합하겠다고 판단했다. 이흥주 대원의 작품은 해병대 사령부의 참모회의를 거쳐 해병대 심볼 마크로 선정되었다>
이밖에도 李慶鍾씨 父子가 발굴한 증언과 자료는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수준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천학도의용대 관련자와의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李씨는 현재까지 약 200여 명을 만나 그중 109명의 증언을 녹취했다.
녹취한 증언 테이프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미 글로 풀어져 기록되었다. 수집한 관련 사진만 해도 250여 장에 이른다. 李씨 부자가 발굴한 자료사진과 「참전사」는 아들 李揆元씨가 발행하는 「서해문화」라는 지방지에 연재되고 있다.
그들은 仁川의 노른자위였다
천주교 신자인 李慶鍾씨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마다 성니콜라오회 수도원에 추도미사를 신청하여 인천 학도의용대 출신의 확인된 戰死者 106위를 추도하고 있다. 지난 3월 중순에 방문한 李慶鍾씨의 자택은 자료실을 방불케 할 만큼 각종 자료, 사진, 패널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어른 키만한 패널(판자) 위에 李씨가 손수 붙이고 기록한 관련 사진과 사진설명이 인상적이다. 거실과 방안에 가득한 패널 40개는 「인천학도병 6·25 참전 기록사진 전시회(2000년 6월19일∼24일)」라는 이름 아래 인천광역시청에서 5일 동안 전시된 바 있다.
李慶鍾씨는 1999년 6월25일에는 KBS 제1라디오 「라디오동서남북」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 인천학도병에 관해 증언하기도 했다.
개인에게는 상당히 소중한 추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관련자들이 사진을 쉽사리 제공하지 않으려고 할 것 같은데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런 사람 딱 한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꺼이 주더군요. 제가 이렇게 말했지요. 「아, 당신 죽으면 이런 사진들 십중팔구 불에 태워질 것 아니냐, 그것보다 이렇게 길이 보존되어 기억되면 좋은 일 아니겠느냐」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아무말 없이 주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다 저처럼 가슴속에 恨이 맺힌 게지요』
李慶鍾씨는 슬하에 삼형제를 두었다.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항렬을 따르지 않아(각각 규원, 용훈, 호인氏) 이름만으로는 형제로 여기기가 힘들 정도다. 이에 대해 李씨는 『제대한 후 하도 일이 풀리지 않고 恨이 남아 조상님이 원망스러워 그랬다』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인천 학도의용대의 활동은 6·25 직후부터 이듬해 1월, 대원들이 현역으로 입대하기 전까지 약 7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대원들의 입대 이후 활동은 정규 군인의 그것으로 기록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 수십만에 불과했던 인천 인구와 웬만한 가정에서 자녀에게 중등 교육을 시킬 수 없었던 경제사정을 감안한다면 약 3000여 명의 학생이 학도의용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李慶鍾씨의 차남이자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편찬위원인 이용훈씨의 분석이다.
『현재 인천지역에는 60~70代 어른들이 드물다고 합니다. 물론 이때의 어른이란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론을 이끌고 지혜를 전수할 수 있는 「어른」을 의미합니다. 인천 학도의용대에 참여한 3000명의 학생수는 당시 인천지역 지식인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인들이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인천지역에 「어른」이 드물다고 보는 분석도 가능합니다』
인천 학도의용대의 참전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李慶鍾씨의 의도는 의외로 소박하다. 필자는 그것이 「소박한 恨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李씨도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가 결성된 이유가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아들이 (참전사를) 밝히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체험과 인천 학도의용대의 참전사를 설명하는 李씨의 얼굴은 매우 밝았다. 그는 『마치 무당이 굿을 하는 심정』이라며 『매우 신이 난다』고 말했다.●
인천 학도의용대가
작사 이기관, 염상건, 김영택
1. 정열과 용맹은 학도의 보배 이 나라의 흥망은 우리의 생명 이 몸을 다 바치어 나라가 흥한다면 우리 학도의용대 죽엄으로써 아∼아 웃으며 꽃이 되리라
2. 임전무퇴 교우이신 화랑도 정신 거룩하신 십용사 뒤를 받들어 백두산 하늘 높이 태극기 휘날릴 때 우리 학도의용대 보람 있으리 아∼아 웃으며 꽃이 되리라 출처 :머나먼정글 원문보기▶ 글쓴이 : 젊은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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