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상사고(落傷事故)
지금은 입향조묘역(入鄕祖墓域)에 1990년에 면봉(緬奉)했지만 14세(世)혁(焃) 영주
이산퉁(伊山通)___우물내골, 15세 세기(世基) 영주 안정통(安定通)___거치실, 양위(兩
位)는 우리 문중의 직계조(直系祖)이기에 문중에서 시사(時祀)를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9대조(代祖), 8대조가 되고 편(떡)을 비롯한 제수를 "버드나무고리" (제수를
넣는 상자)에 넣어 등에 지고 50리 길을 다녀 오시곤 했다. 그리고 그 아랫대 (代)는 문
중산소(입향조묘역)에 모시고 문중에서 시사를 올리고 있었고 지금은 면봉했기에 모두
한곳에 계신다.
어느해 아버지는 영주 묘사(墓祀)를 마치고 귀로에 화물자동차에--그때는 화물자동차에
많이 탔다--편승하셨다가 봉화 다리(橋)에서 내렸는데 떡고리에 묶여있던 끈이 엉켜 사람
은 내렸지만 짐을 당기는 중인데 운전수는 하차한줄 알고 떠났다.
끈에 엉켜 사람이 끌려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진 큰 사고가 일어났었다.
누구와 같이 가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별이 와서 고향에서 가마(혼사에 사용하던 탈것)를
가지고 가서 태워 오셨다.
온동내 어른들이 모여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한약을 드시면서 치료중에도 그 허리가 아파서
우리들에게 허리를 밟으라고 하셨다. 그때는 허리 밟아 드리기에 지쳐서 놀고 싶은 어린 마음
에 싫은 때도 있었다. 몸 보신을 하시면서 치료는 했으나 건강을 회복하시기엔 오랜 시간
이 걸였었다.
집안 어른들이야 수시로 병세를 걱정하고 자주 문병을 했지만 외지에서 친인척 친지들의
문병이 많아 손님이 이어지기도 했었다. 그 손님 수발에 안에서는 간호와 함게 이중고를 겪
으셨다. 그 사고로 완치가 안된 허리 아픈것은 평생을 같이 했었다.
어느 봉화(그때는 내성) 장날에 아버지를 따라 갔다가 그 운전수를 본듯한 기억이 난다.
얼굴이 넓적하고 긴편이었으며 아버지에게 공손히 인사드리고 건강상태를 물으면서 장
국밥집으로 모셔가 잠심대접을 했었다. 나도 국밥 한그릇 비우는 행운을 얻었었다.
아마도 탄약값 정도는 운전수가 부담한것 같지만 그것으로 사건처리는 마무리 된듯 했었
다. 아버지가 그 운전수를 대하는 모습으로 봐서 그렇게 느껴졌다.
지금 이런 사고 의 수숩방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옛날의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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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대(先代)께서 영주에서 살았던 연고로 이산(伊山), 안정(安定)에 모셨던 14, 15세
(世) 두분 할아버지의 묘소는 가을이 되면 꼭 벌초(伐草)도 문중에서 했었다.
1964년 음력 8월의 벌초는 문중에서 동양(棟陽), 승문(勝文), 승린(勝麟)--모두 작고--세
사람이 같이 가서 했었고 (棟陽)씨가 우물내골(伊山)에 모신 14세 혁(焃)할아버지의 비
문(碑文)을 물로 씻어가면서 서사(書寫)해 왔었다.
그 비문에 우리집 계대(系代)와 약사(略史)가 있어 계대정리에 큰 도움이 됐었다.
이 비(碑)는 2001년 아버지 영모비 세울때 세째 형님이 사비(私費)로 원문대로 새로 개
수(改竪)했다.
*아버지가 이 두분 할아버지의 묘소 가을 시사를 지내고 오시다가 낙상사고를 당하신
일과
*1964년 묘소 벌초할때 비문 사본을 해와 문중의 중요한 자료가 된 일
모두 숭조(崇祖)행사에서 빚어진 같은 사실이기에 함께 실어 다음 세대에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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