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보호(保護)
손재주가 좋았던 큰형님은 어느 해인가 도장 파는 일이 재미가 있어 이애 열중
했던 때가 있었다. 도장 파는 재료로는 화양목, 내추나무등 재질이 견고한 것으로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대였다. 동내 어른들이 도장을 잃거나 새로 장만할 일이 있
으면 으레이 형님을 찾았었다.
일제시대에 목화생산은 중요 정책이었다. 각면 마다 면작지도원(棉作指導員)을 두
어 목화밭으로 지정되면 그 밭에 팻말을 꽂고 간섭을 받아야 했다. 물론 전생산량
수매를 위해 자가소비도 억제 단속 했었다. 농촌에 돈이 없어 광목,옥양목..(옷감)
을 살수 없으니 옷 벗고 살수는 없고 무명옷을 만들어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숨어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수작업으로 무명을 짰다. 이 무명 한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렵고 수고로운 것인지 지금 사람은 상상도 못한다.
그런데 한가지 고마왔던 것은 군것질거리가 없었던 시절에 목화가 꽃이 피고 열매
가 커갈때 그것을 따먹으면 달콤하고 씹는 맛이 있어 먹을 만했었다. 숨어서 지도원
이나 밭임자에게 들킬세라 조심하면서 참 많이 따먹으면서 컸었다.
이렇게 일제가 역점을 두고 목화를 생산하고 자가소비의 억제와 강제 수매에 나섰던
시대에 도장 파기에 재미가 붙었던 형님이 "목화수매카드"에 찍힌 도장을 본따 그것
비슷한 것을 파서 고의없이 "커드"에 찍어 봤었다. 다른 곳에 찍어 비교해 보고 조각의
오묘한 재미를 느껴 봐도 될터인데 하필 수매때 마다 쓰는 "카드"에 찍어 화를 자초했다.
아무 뜻없이 도장을 본 따서 찍은 "카드"의 도장이 위조라고 문제가 됐다는 소문을 들은
아버지는 내심 걱정하고 계셨다.
후에 이 문제로 경찰관이 찾아와 조사할 것이 있다고 동행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경찰관에게 주저없이 '내가 한 일'이라고 따라 나셨다.
온집안의 걱정거리가 됐음은 물론이고 달리 방법도 없으니 빨리 나오시기만을 일각(一
刻)이 여삼추(如三秋)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울던 아이도 "순사 온다"고 하면 울움을 끝힌다는 무서운 곳에 가셨으니까.....
경찰서나 면(面)마다 있었던 주재소(경찰관 주재소)는 평생 가기 싫은 공포의 대상이
었다. 죄가 없어도..........
집에 돌아 오셔서 온식구가 모인가운데 전하는 예기는 손 들고 꿇어 앉아 벌을 받았다고
하셨다. 경찰조사에서 고의(故意)는 없었음을 인정한 것은 양식(良識)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행이었지만 그렇다면 훈계하고 돌려 보내야 되는데 당시의 경찰은 그 위세가 등등했었
다. 권위의식이 대단했던 시절이기에 겁을 준것 같았고 사건은 이렇게 아버지가 나셔서
마무리가 됐었다.
어떤 경우라도 자식은 늘 안전지대에 두고 아들의 허물도 대신 하시겠다는 따뜻한 사랑의
내면과 어떤 희생을 대신 하더라도 자식은 꼭 지키시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행동으로 옮
겨진 가정사였다.
큰형님의 마음도 몹씨 괴로왔을 것이고 그 후로는 도장 파는일도 추춤하더니 끝내 손을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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