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大邱) 나들이<애석했던 집안 조카>
그로 부터 세월이 흘러 문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1984년 쯤인지 도로공사를
그만 두고 대구에 정착 했었다.
처음엔 주택을 신축해서 입주 했다가 시세사 좋아 팔고 다시 대지를 물색하여 새집을
짓고 정주 했으니 경제적 능력도 대단했고 느긋한 여유를 보였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부랭이 아랫마을 협소한 집에서 뛰쳐나와 세상 넓은 곳에서 날개를 펼쳐 높이 날아가
대도시에서 한자리를 찾이한 보금자리.....자랑할만한 성취에 만족 하지않고 관변단체
에 취업하여 고정수입도 확보하는 생활 능력도 과시 했었다.
이러할 때에 큰형님이 대구 나들이를 하셨다. 그때 나는 법원앞 2층을 얻어 살때였으니
조금은 안정을 찾아서 마음의 여유도 생겼을 때였다.
형님은 평생 혈압관리를 하고 계시기에 저녁상에는 손쉬운 미역국을 대접했고, 아침에는
범어시장에 나가 보니 생대구(어물)가 있어서 그것으로 국을 끓어 대접했더니 입에 맞으
셨다고 만족해 하시던 모습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낮에는 형제기리 시내 번화가를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백화점 구경을 갔었다. 그 전 부터
대구백화점 가구(家具)부에서 일 하던 정서(正緖)의 초대를 받고 있던 중이었기에 찾아가
불고기 정식으로 정심 대접을 잘 받았었다.
백화점 구경한다고 "에레베에타"를 탔는데 어지러워 하시기에 걸었고 "에쓰카레에타"도
역시 싫어 하시기에 걸었다.
피곤해 하시기에 옛 도청 자리를 찾아 경상감사가 있던 유서 깊은 옛 정취를 더듬어 보고
귀가 하여 쉬었다.
이튿날 부랭이에서 같이 살았던 강봉천씨의 아침 초대를 받아 같이 신천동으로 갔었다.
고향 떠난지 오래되어 서로 반가와 하셨다. 취로사업에 출역하여 장만했다는 쌀포대가
여러포 방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우린 양식 걱정은 안하고 산다" 고 웃으시며 자랑
했다. 우리 촌사람 입에 잘 맞는 아침상을 받아 잘 먹었고 그 중 고등어 한토막의 맛이
별미여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내당동 문서집으로 안내해 드렸다.
아들 집에서 하루를 잘 쉬셨을 것이고, 이튿날 일찍 연락이 왔었다. 같이 온천 다녀 오라
고 했다. 그 때 전국에 알려지고 각광 받던 경남 창녕의 "부곡 하와이".....서부정류장에서
뻐스로 창녕에 갔다. 식성에 맞으실 음식 골라 점심 자시고, 온천욕도 즐기시고 주변 경관
도 걸어 다니며 살펴 봤다. 마침 "쇼__"단의 공연이 있어 의자에 앉아 무료 관람도 했다.
좀 피곤 하셨겠지만 그래도 즐거워 하시는 모습 바라보면서 자식들의 조그만한 배려애도
이렇게 기뻐 하시는 어른들의 깊은 속을 ......무미건조한 날만 이어지던 벽촌의 생활을 잠
시나마 벗어나 달라진 세상 모습을 접해 보는 기쁨으로 이를 즐기시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때로는 감탄사를 연발 하시면서 이 곳을 찾은 많은 인파속에 묻혀 휴식과 환락의
공간을 같이 해 봤었다.
_____이젠 기억속에서만 남아 있을뿐 모두 세상 떠나시고 생전에 걸으셨던 발자취도 세
월과 함께 흐려지고 있다.____
<애석(哀惜)했던 집안 조카>
우리 문중의 출향인(出鄕人)으로 정서(正緖)는 대구에 정착, 대구백화점 가구부에서
일하면서 가구에 관한 여러가지를 터득하고 퇴직한 뒤 직접 가구점을 운영했는데 자금
회전의 부실로 실패하고 그 충격이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었다.
그 소생들은 외가인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2004년 여름 점서(点緖) 장례때 잠간 가족을
만난는데 반듯하게 잘 자라줘서 고마왔다.
그래도 뿌리는 잊지 말라고 우리 반남박씨 판관공파 파보(派譜) 1질을 안동 호서편으로
보내 제주도로 전해 주라고 남겨 두었는데 어떻게 처리 됐는지는 모르겠다. 그들 3남매를
아끼고 앞날이 잘 풀리길 바라는 내 마음이 커가는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길 바랐었다.
1983년 내가 맨주먹으로 막막한 심정을 안고 대구에 왔을때 집안 조카인 정서(正緖)의
따뜻한 마음가짐을 보고 감동과 많은 위로가 됐었다. 고마왔다.
또 출향인으로 정서의 종제(從弟) 호서(虎緖)의 참사를 2015년에 듣고 충격을 받았었다.
편모시하에서 고생도 많이 했고 안동에 정착하여 이제 겨우 허리 펴고 지낼만큼 자수성가
했는데 왜 또 걲기는가? 집안의 유망한 큰일꾼들이 죽어가니 어디를 원망해야 하나?
우리 문중 19세(世) 3형제중 맏집인데.....
내가 오랜 세월 같이 지낸 윗대 형제분은 문중 일도 많이 했고 고생도 많이한 세대였다.
그 아래 세대 (정서, 호서 세대)라도 잘 풀리길 바랐는데 참으로 원통하고 애석한 일이다.
특히 호서 윗대(兒名, 억수)는 늘 웃음 띈 얼굴로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해줬고 나와는
같이 컸다. 집안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거들어 주던 넉넉한 마음씨를 가졌었다.
내가 봉화 살때 이사때 마다 꼭 와서 이삿짐 날라다 주었지....내가 살아 있는데 나보다 한살
아래인 동생인데 아직 살아 있어야할 나이....먼저 간것만도 억울한데 왜 아들 가는걸 막지
못했나? 남은 가족 더 눈물 흘릴일 없도록 보살피고 또 살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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