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한곳에 출가한 누님,그리고 외손들

bsk5865 2021. 10. 12. 20:39

한곳에 출가한 누님,그리고 외손들

 

자매가 한곳에 만나 살고 있으니 세상에 흔한 일은 아니다. 어릴 때 7살 차이로

자랐지만 성인이 돼서도 한동내로 왔으니 그것도 축복? 이겠지..........

 

이에 앞서 큰누님이 출가한 남양홍씨 두곡선생의 후예 집성촌인 띠띠미 (杜洞 두동)

의 가을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내 어릴때의 기억이지만 생전 보지 못했던 산수유와 잘 익어가는 감(枾)이었다.

별천지에 온듯 신기했다.

한약재인 이 산수유가 큰  소득원이었고 다른 곳에는 없는 부존자원인것과 이른 봄

제일 먼저 피는 이 꽃은 온 고을을 노랗게 덮어버리는 장관을 이룬다는 것은 철이

든 후에 알았다.

 

같은 또래 동갑인 큰 생질과 놀때 이웃에 있던 친구도 사귀고 큰생질 4촌과도 어울

렸으며 그 중 친구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기도한 인연이 이어지기도 했었다.

 

집으로 돌아 올때는 감을 한자루 지고 왔으며 그것이 큰 선물이었고 오는 도중 짖

눌려서 홍시가 된것이 있어 먹어 버린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자그만한 체구

에 감을 얼마나 지고 왔을까? 그 먼길을......

 

큰생질의 조부는 한학자(漢學者)로서 우리집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철이 들

어 짐작했었다. 그 사장어른이 의관정제하시고 사랑방에 계시던 모습도 기억할 수

있다. 벼루집 뚜겅에 종이를 받히고 글을 쓰고 계시는 모습도....

 

작은 누님댁에도 내 또래의 생질의 4촌 형제들이 같이 살았고 그 사촌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  4촌들 까지 훌륭해게 키워 성가 시킨것을 보면 본받을 집안이란 것을 알수 있다.

 

우리 생질들은 외가에 대한 정의(情誼)도 있고 특히 2001년 아버지 영모비 수립을

위한 모금을 할때 세분 누님의 외손들이 크게 호응하고 성금을  빠짐 없이 보내주었

었다. 이는 우리의 큰 자랑이 됐었지... 정말 우리 외손들 자랑스럽다.

외조부의 가호가 고루 이어지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부분 고향 떠나 객지에서

튼튼한 뿌리를 내렸으니 그 앞날은 창창하리라...

 

작은 누님은 자식들의 효도 속에 미수(米壽)를 훌쩍 넘고 백수(白壽)를 바라보고 있

었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자연 순리(順理)는 어길  수 없는 것인지 2015,

9, 9, 천수를 다하시고 97살에 떠나셨다.

영전에 서고 보니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이제 피를 나눈 8남매중 위로는 모두

떠나시고 끝으로 둘만 남았다. 91살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이어 누님은 97살에 가셨

으니 우리 가계로 봐서는 최장수를 누리셨다.

 

상가에는 누님이 남긴 7남매와 그에 따른 식솔들이 조용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움직

여 성의를 다하는 접객(接客)솜씨에 자형의 엄하신 가통이 살아 이어지고 있음을

보는듯 흐뭇했었다.

 

평창이씨 가문에 출가하여 복 받은 자식들 잘 키워냈고 좋은 가풍을 이어 남겼으며

하실일 훌륭히 다하시고 가신 누님의 명복을 빌었다.

 

지난 세월 친구의 권유로 해본 양봉(養蜂).....월동 시킬 자신이 없어 무적정 생질 원호를

믿고 갖다 놓은 일이 있었다. 그걸 거절 못하고 받아 준 원호에게 지금 생각해도 잘못

됐고 미안한 일이었다.

송이 철이 되면 송이 채취에 비법을 지닌 원호 생각이 나고, 재산에 근무할때 매년 "재산

마늘" 보내 주었던 성호....모두 고마왔다.

 

봉화 성당에서 유능한 생질부 만나 인연이 되어 결혼식을 올리던 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새 모두 고희(古稀)의 고개를 넘었으니.....그래도 잊지않고 교류하고 살고 있으니 나

는 행복하다.

 

고향에서 공직에 공채되어 나아가 그 직(職)에서 청춘을 아낌없이 받힌것이 반평생이다.

거기서 인생을 새로 배워 가면서 훌러 보낸 세월이 길었지만 그 세월이  보람도 있었고

아름다왔을 것이다.  좋았던 그 시절을 마감한 정년퇴임....그래도 아쉬움은 남아 있었겠

지....

이제 남은 반평생은 가족이 있는 서울에서 또 다른 인생을 사는 모습이 젊음을 구가했던

시절 보다 더 안정되고 평화로울 것으로 짐작된다.

 

조용히 자기 주변을 돌아 보고 작은 공간이나마 내 생활 영역도 다듬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자기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생활문학"에서 소개된 당선작 수필 두편을 읽고 여기 또 다른 성호(盛浩)가 있구나! 하고

반겼다. 5년전에 신인상도 수상했다고 하니 늦었지만 축하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련다.

앞으로 잠재능력을 발휘하여 의욕적인 작품활동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한가지 미안했던 일은

지난 2016, 1, 11, 계산성당에서 봉행한 서품식에 참석 못한 일이다. 얼마나 영예로운

큰 행사였었고 가문의 영광인데 축하를 못해 주어서 미안한 생각 지울 수 없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내 肝(깐)잘환 때문에 종합병원에 예약된 날이었고 안으로는 허리를

다쳐 보행이 어려웠었다. 지금도 허리로 연유된 다리 때문에 병원을 전전해 봤으나 별

효과를 못 봐 불편을 겪고 있다.

 

세분 누님의 소생들은 대부분 고향 떠나 서울, 인천등 서울 생활권에서 정착 서울 사람

으로서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남보다 훨씬 앞서 성공한 인생길을 밟아 가는 외손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 외손들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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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 하오 서울서 생질 내외가 두째 딸이 차를 몰고 내 아파트 까지 찾아와 새해

인사를 나누었다.

누님 돌아가시고 2015, 9, 10, 장례식장에서 만나고 처음이다.

 

생질부는 봉화 있을때 부터 안으로는 각별한 사이였고 "한번 만나 봤으면"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평소 상냥하고 인정 많은 그 생질부를 그것도 집에서 편안하게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을

까....우리는 연락 받고 "이렇게 보면 생에선 마지막일것"이란 이야기도 사전에 나누었

었다.  봉화에 있을때는 저 아랬쪽에 있는 젊은층으로 여겼는데 어쩌다 보니 이젠 같이

늙어 가는 처지가 됐었다.

 

만나 보니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보통 시민으로서 손색 없이 내집 지키고 살고 있다니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무엇보다 인생 노후를 여유있게 즐기면서 보내고 있으니 이는

인생 전반기의 노고와 적덕(積德)의 응보(應報)라고 믿어 진다.

 

우린 생질 내외가 오면 점섬 같이 즐길 일?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예 점심 때를

지나서 천천히 와 주었다. 점심때를 피하려는 배려라고 이해는 하고 있으나 고래로 내

려오는 세속(世俗)에 젖어 있는 늙은이로서는 때 한끼 대접 못한 것이 더욱 미안해졌다.

더구나 분에 넘치는 세뱃돈도 받은 처진데....

 

생질 내외에게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차를 몰고 먼길 찾아 온 두째딸!  어쩌면 그렇게 잠간 봐도 그 처신이 반듯하냐? 놀랐다.

진외가 늙은이만 둘이 사는 집이라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낯선 남의 집인데....내 집 같이

마음을 붙혀 부엌에서 하는 일이 어떻게 그렇게 자연 스러울가?....

근본이 있는 집안의 규수로 어디에 가도 손색이 없는 자랑 스러운이씨 집안의 딸인 동시

에 외손이다.

 

두고두고 흐뭇했던 정월 대보름날인 2018, 3, 2, 을 오래 기억하면서 이젠 서울 사람이 된

생질의 가정에 좋은 일이 연이어지길 바란다.   (2018,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