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비(永慕碑)수립의 역사(役事)
2001년 우리 대가족 164명이 합심하여 세운 아버지 영모비(永慕碑)는 우리 세대가 이룩
한 가장 자랑할만한 장거(壯擧)라고 자부(自負)해 본다.
이에 대한 문헌이 남아있어 거기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으나 다시 그 대강을 추려 보면
볼수록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형님의 제의를 받고 비문(碑文)을 다듬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었다. 우리 가사에 남을
것이기에 명문(名文)은 아닐지라도 문장(文章)으로서의 흠결(欠缺)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수정(修正)에 수정을 거듭 했으며 자구(字句)하나에도 신경을 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비문의 작자(作者)도 명시 못했다. 자식이 지으면 안된다나?
말도 많아서........
지난 2000년 10월 어머니 기일(忌日)에 참례하고 거기서 처음 공개했다. 취지(趣旨)설명
등을 통해 대찬성을 얻었으며 모금 대상은 8남매를 정점으로 손자대 까지의 성인으로 하고
모금방법등도 대채로 합의 했었다.
모금을 위해 취지, 안내 대상자 조사등 행정적인 것을 위시한 추진 실무 담당을 구서가 맡
아서 고유제(告由祭)까지 혼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원만하게 마무리 했었다.
특히 동서팔방으로 생업따라 산재해 있는 혈손들의 주소록을 만드는데 고생 했을 것이다.
이의 호응(呼應)은 친, 외손을 가릴것 없이 모두 좋았고 빠진 외손도 없거니와 출가한 외손
녀 까지 성금을 보내주었고 외조부에 대해 경의를 표해 준데 대해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었다.
이 비(碑) 후면(後面), 측면(側面)에 지손임을 밝혀 긍지를 갖게 하기 위해 자손록(子孫錄)을
각석해 두었다. 어느 때 와서 보더라도 그 감격을 되새겨 보는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아울러 같은 할아버지의 혈족이라는 일체감과 세파(世波)에서도 서로 협조 단결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과도 함께..........
미진(未盡)한 것은 "재정만 허락 했다면 고유제(古由祭)를 알만한 사람 모두를 초청한 가운데
성대하고 알차게 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고 또 "8남매가 생존해 있을때 왜 못했나?"
고 하는 한(恨) 많은 후회도 남겼다.
만약 먼저 가신 위로 형제분이 계셨다면 아버지 모시고 살아 오신 긴 세월속에서 얻은 경륜
이 더해져서 더 알찬 행사가 됐을 텐데........2007,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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