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환갑,진갑의 회고(回顧)

bsk5865 2021. 10. 17. 09:28

환갑,진갑의 회고(回顧)

 

1983년에 대구에 빈 손으로 와서 5년만인 1988년말에 아파트에 입주하고 겨우 잃어버렸

던 내집을 찾아 안착 했으니 이로서 집 없는 서러움을  덜었었다.

고향 떠날 때 큰집 가족들의 마음은 빈 손으로 객지에 떠나는 것을 무척이나 안스러워 했

을 것이다. 어쩌면 봉화에 내가 있다는 것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 가는 한 거점(據点)일 수 도
있었을 것인데....그것이 없어져 서운했을는지도........

 

세월이 흘러 1990년의 환갑은 그저 생일 처럼 보냈다. 부모 생각에 또 내 처지에 환갑이라

고 야단스럽게 나설 일도 아닌듯 했었다.

그러나 대구에서 7년....아들 결혼식에 먼 곳에서 와서 당일 돌아가신 일, 7년 동안 대구 생활

에서 이룩한 것들....이제 사람 구실 하면서 살아 가도 될듯한 생각이 들어 1991년 진갑 잔치를

해 보자는 쪽으로 가족들과 수의 끝에 생각을 바꾸었다.

 

잔치에 초청한다고 해봐야 고향 내 가족이다 ,봉화서 잃었던 것 대구서 찾았고 나를 아껴 주었

던 가족의 고마움도 표시하고 5형제가 한자리에 앉아 보고 싶어 졌었다.

내 가족 3남매는 모두 대구서 살기에 그것도 내 복이고 진갑일의 행사, 접대등의 계획, 예약까지 

저이들이 알아서 잘 해 주었었다.

 

1991, 3, 9, (土) 전야 행사는 동대구호텔에서 식사와 함께 축하연이 있었다. 축하연에 앞서 

진갑을 맞는 주인공을 치켜세우는 행사도 까끔하게 잘 준비된 모습으로 마무리 해 주었었다.

 

생각 해 보면 세상에 나와서 별로 가족이나 사회에 이바지한 바도 없고 능력 있는 가장도 아니

어서 고생만 시킨 부끄러운 존재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만은 나의 60년을 반추해 보면서 관심과

위안을 받고 싶어졌었다.

 

전야 1부 행사와 식사도 끝나고 약주도 몇차례 오고 갔다. 이어 감미로운 경음악에서 흥겨운

가락으로 바뀌고 분위기를 한층 북돋우어가자 자랑 하곺은 비장의 한가락들이 쏟아져 나왔다.

흥겨운 춤판도 벌어 졌다. 잘한다 ,못한다는 제쳐두고 내 기분이 모두의 기분과 한데 잘 어울리

면 족한 것이었다.

어린 외손녀 "혜정"이가 한몫 끼어 홍일점으로 춤을 선 보여 귀여움을 받았었지!....

예약시간을 끝내고 동대구역 주변에서 끼리끼리 어울렸다가 신암동 집으로 합류했고 늦도록

거실에서 마시고 웃고 노래하고 흥겨워 하면서 이 밤을 즐겼었다. 지나고 보니 아파트 이웃들

에게 잠을 방해해서 미안했었다.

 

다음날 3월 10일 아침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추모하는 제사를 올렸다. 예법(禮法)을

논하기도 했지만 그것 보다도 어머니 생신과 내 생일이 같은 날이어서 평생 어머니 생신 덕을

봤고, 3남매 키워 첫 손자도 봤으니 객지 고생 끝에 사람 노릇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

들을 고(告)하고 싶고 또 제례의 격식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모인 제관(祭官)은 우리 가족  뿐이지만 그래도 일체감(一體感)같은 것이 교류될 것이기에.....

근서(根緖)가 제주(祭主)로 고축(告祝), 초헌(初巚)하고 제례는 엄숙하게 봉행했었다.

 

철상하고 많은 식구들이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큰 상 차려놓고 자식들 조카들의 하례를 받았다.

그리고  장만한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면서 끼리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담에 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냈었다.

 

마지막 오찬으로는 이름있는 신암육교 한식집에서 반찬을 고루 갖춘 한정식으로 준비해 대접했

었다. 이동하기에 좀 불편 했지만 식사 분위기는 좋았고 흡족해 하셨다.

 

이것으로 부끄럽지만 고향 가족을 초청 대구나드리를 시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동대구역에서 도중 편의와 집까지 돌아 가시기에 불편이 없으시도록 배려했음은 물론이다.

 

피차 평생의 추억이 될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나름대로 내 형편의 범위내에서 정성을 다했다고

자족해 봤었다.

그리고 대구 내집 식구들의 노고가 컸었다. 그 노고가 크면 클수록 보람도 컸으리라 믿는다.

 

지나고 보니 5형제가 건재했을때 치룬 일이라 그 때가 참 행복했었다는 생각과 그리움이 가슴을

에워도 풀길이 없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또 그때 함께 즐겁게 지냈으나 지금은 세상 떠난 여러 얼굴들을 다시 떠올려 보고 명복을 빌었다.

곧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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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7월  5년 연하인 안사람은 결혼후 40년을 보내고 회갑을 맞이했다. 

이 날은 대구에서 보내기 보다 좀처럼 같이할 수 없는 친정 식구들과 함께함이 더 뜻이 깊은 일일것

같아 친정집이 있는 대전에서 보냈었다. (1995, 7, 15, 土)

 

친정에 처가에 외가에 함께 도착하여 예약된 식당에서 대전 식구들과 합류했었다. 대전 식구들이 모두

참석  즐거운 웃음꽃이 피는 한 때를 보낼 수 있어 좋았고 이렇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전에 인사말을 통해 참석해 주어 영광이고 고향에서 같이 자라던 추억의 자리로, 또 잘 키워 주신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리로 만들자고 했었다.

자식들이 준비한 기념품의 전달도 했고 맏 손녀 "혜정"이가 축가로 푸릇을 연주해 주었으며 어린 손자

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꽃다발도 받았었다.

 

무엇 보다도 장모님이 쟁쟁한 모습으로 자리를 함께 해주어 이것 또한 큰 축복이었다. 서로 여생(餘生)

동안 잊을 수 없는 모녀의 감회는 깊었을 것이다.

2차는 자리를 옮겨 여흥을 즐겼고 준비해 갔던 선물도 전했다. 

아쉬움은 컸지만 찾아 갈곳으로 헤어지고 이밤은 고요히 흘러 갔다.

 

이튿날은 동학사를 둘러보고 관광지의  자리 좋은 식당을 찾아 중식을 즐긴 후 해산(解散) 대구로 

돌아 왔었다....1995,7, 16, (日)

 

빈손으로 대구로 내려와서 인생의 밑바닥 부터 새로 시작한지 10여년만에 맞은 회갑날!  이날의 감회

도 깊었지만 이런 날이 있을 줄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소박하고 작은 꿈이 이루어진 것에 늘 감사하고 고생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가정과 자식들을 지켜 키워낸

그 저력(底力)을 놀라와 하면서 여생을 두고 감사의 마음을 지니련다..

 

지금의 세태는 회갑에 큰 뜻을 두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과 다른 구세대(舊世代)를 살아 왔고 까마득한 

20년전의 일이라  인생의 한 고비를 가르는 경계를 넘어온듯한 기분이다......2015,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