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명당에 모신 생원(生員) 할아버지

bsk5865 2021. 10. 16. 00:46

명당에 모신 생원(生員) 할아버지

 

군량골 산 소유 명의를 꼭 변경등기해 두어야할 당위성(當爲性)이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 집 내력과 연관되어 있다. 먼 훗날 우리집 역사에 관심 있는 후손이 나타나면

참고가 될 것이라고 믿어 적어 둔다.

 

군량곡(軍糧谷)산은 옛날에 사람보다 산이 더 많았던 시절 ....재산의 개념보다 묘지

(墓地)에 대한 관심이 더 컸을 1800년대에 19세(世) 시운(時雲)__성균생원(成均生員)

__할아버지 묘소를 마련하기 위해 장자이신 20세(世) 종익(宗益)할아버지 3형제가

집안 어른이신 고희(古稀)의 백부(伯父)를 모시고 연장(年長)이신 종형(從兄)과 함께

뜻을 모아 군량골과 연고(緣故)를 맺은듯 하다.

그러하기에 군량골 산의 존재의의(存在意義)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것 같다.

 

족보의 생졸연대(生卒年代)를 상고해 보면 그때 (1849) 돌아가신 생원 할아버지의

맏형 (시도_時道)은 생존해 계셨고 아들 3형제(20세 종익(宗益);우리집, 승섭, 창서

집    종대(宗大); 경서 장군집    종선(宗先); 울진집)분 외에 큰집 종형제 4명, 어린

손자대인 재종형제(再從兄弟)는 7명이다.

생원 할아버지 장례때 (1849)의 가족이란 장유(長幼)를 불문하고 모두 15명으로 늘어

났을 뿐이다. 그래도 외동으로 여러 대를 고적하게 지내던 세월 보다는 얼마나 감사할

일이였겠나 !

 

우리집 세계(世系)의 그 윗대는 영주 조와(助臥)리에 10세 형(珩)_참판공_,   11세 승문

(承文)_교수공_,   12세 해(海)_어모공,,,3대(代)가 나란히 계시고  13세 지무(枝茂)_문중산소

, 우리 문중의 큰 어른이시다.  14세 혁(焃)_영주 이산(우물내골)에서 면봉(緬奉)  15세 세기

(世基)_영주 안정(거치실)에서 면봉  16세 문식(文植)_군수  17세 눌(訥)_가선대부  18세

사덕(師德)_가선대부 이상 5대는 자매는 있었지만 외동으로 사시다가 돌아 가셨기에 문중

산소인 입향조묘역(入鄕祖墓域)에 같이 모셔 놓고 받들고 있다. 모두 우리의 직계조이시다.

 

# 우리 판관공(判官公)파 3형제중 막내인 10세 형(珩_참판공)의 자손이고 장파(長派),중파

(仲派),계파(季派)중 우리는 "계파"라 부른다.

 

# 직계 선조를 알기 쉽게 나렬하면 선조~8세 병균(秉鈞)_판관공_분파선조(分派先祖)_ 9세

숙(䃞)_승지공_ 10세 형(珩)참판공 이하는 위와 같다.

 

19세에 와서야 3형제 (시도(時道), 시우(時雨), 시운(時雲), 분이 나셔서 자손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고을 이름대로 부랭이(潤洞)이란 말의 현실화(現實化)가 시작된 셈이다.

 

군량골 생원 시운(時雲)__아버지의 고조부(高祖父)시고 나의 5대조가 되신다.  그 산의 좌편

능선에 위치한 그 묘 자리는 그 당시 앞을 봐도 산! 뒤를 봐도 산! 산 뿐인 산촌(山村) 부랭

이에서 거리를 둔 그 군량골을 찾아 여러번 답산도 해봤을 것이고 고르고 골라 길지(吉地)

라고 잡아 갑좌(甲坐)로 모셨을 것이다. 소원의 으뜸은 자손의 번창을 꼽았을 것이고.......

영주서 이곳으로 와 18세까지 고을만 찾이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초조했겠는가?

 

생원 할아버지는 184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 후 1917년까지 68년간은 장자 승계의 법도

에 따라 20세 종익(宗益)할아버지  21세 일수(一壽)할아버지  22세 제명(齊明)할아버지

23세 경양(敬陽) 큰 아버지를 중심으로 여러집으로 나뉜 자손들이 정성껏 봉제사(奉祭祀)하

시면서 잘 지내왔었다.

 

불행하게도 1917년에 제주(祭主)인 주손이 끊겨 예법대로 두째집인 아버지가 1917년부터

26세때에 이를 이어 받으셨다.

특기해 두고 싶은 것은 이어 받으신지 9년만인 1926년 35세때 석물(石物)을 갖추어 놓은

일이다.  지금 세상이야 돈만 있으면 쉬운 일이지만 그 때의 형편을 짐작해 보면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인데..........

 

그 무렵에 우리 형제는 1926년 까지 내 위의 창평으로 출가한 누님까지 7남매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 큰 누님은 15살, 그 아래 큰형님이 12살, 작은 형님이 10살이였으며 한문선생을

초빙하여 글을 배우게 했다고 들었다.

우리 아버지도 고모가 셋이 계실뿐 외로운 처지였다. 지금은 식구가 많이 늘었으나 가정형편

은 농사 뿐인 그 시절....그 형편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제일 크신 군량골 고조부를 섬기는 지극 정성이 있어 비석을 세우기로 결심하셨으니

그 집념도 대단했겠지만 시사하는바도 큰, 역사(役事)였을 것이다.

내가 형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석공(石工)을 대려 와서 수작업으로 다 했다는 것이다.

각자(刻字)에 쓰인 공구(工具)는 간이 벼름깐을 마련해 놓고 공구를 벼름질 해가면서 사용

했단다.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렸을까?........

 

그 때 어머니는 내 위 누님을 업고 37세의 나이로 집의 식구 남의 식구의 먹거리를 하루 세끼

꼬박꼬박 마련했을 것이고 샛참도 준비 했을 것이니 그 고생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시대 며느리들의 생활모습은 지금의 잣대로 본다면 가히 형벌(刑罰)일 것이다......그래도

어머니는 9순을 넘기셨다.

 

생원 할아버지와 아버지와의 출생간극(出生間隙)은 100여년이다. 전해 오는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후 (死後)77년이 경과한 뒤에 비문(碑文)을 작성 했으니 무엇을 상

고(詳考)했을까?

 

내가 철이 들 무렵 큰집 안마루 샛방엔 한문 고서적이 많이 쌓여 있었다. 어느해인가 원인

모를 불이 나 고귀한 서적들이 많이 타 버렸고 타다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그 중 후에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이고, 천자문 뒤에 읽었다는 동몽선습(童蒙先

習), 명삼보감, 소학, 문집,...등이 있었다.

아마도 오대조(五代祖) 생원 할아버지 (19세 時雲)에 관계된 문헌(文獻)도 같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상고(詳考)했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종가집에 불이 났을때도 영주서 부터 전해 오던 선대(先代)의 교류(交流) 문헌(文獻)들이 몽땅

소실 됐다고 들었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이런 귀중한 자기존재를 입증(立證)할 수 있는 가보적(家寶的) 사적문헌

(史跡文獻)도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 왔다.

 

생원 할아버지의 비문(碑文)은 나의 큰생질의 조부 즉 큰누님의 시아버님니이신 한학자(漢學者)

홍두섭(洪斗燮)사장 어른이 짓고 쓰셨다. 명문(名文)이요, 명필(名筆)이 셨으니 자랑할만 하다.

그 원문과 번역본이 있었을 것인데 보관이 소홀해서 전해 오지 못해 아쉽다.

 

내가 고향에 머물고 있을때 비문의 탁본을 시도 해 봤으나 경험도 없고 방법도 잘 몰라 실패했

으니 이것도 후세에 당부해 두고 싶다. 원문 탁본과 번역본을 만들라고....

"成均生員 潘南朴公 時雲之墓" 큰 글자 12,  본문이 321자인데 90년이 흘렀는데도 자획(字劃)

이 분명하다.

 

아버지 살아계실때 10월이면 산소에서 시사를 올렸다. 군량골 이 묘소에는 꼭 분향고축(焚香告祝)

하고 제물도 따로 장만했으며 메(밥)와 갱도 올렸고 편(주로 시루떡)도 높이 괴었고.....

그때는 사대봉사(4代奉祀)를 했으니 아버지의 고조부(高祖父)이기에  기제(忌祭)도 올렸다. 음2월

29일 기제때도 제일 큰 제상에 제수를 진설했으며 제례절차도 까다롭고 엄숙 했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주손이 되어 모든 것을 행사 하시었고 석물(石物)을 갖추어 놓았다는 것은 그 시대

엔 큰 장거(壯擧)였을 것이다.

 

지금 부랭이 박씨들은 아랫마을 복양아저씨, 안동 호서집은 19세 시도(時道)__맏집__할아버지 후손

이고,  두째집 시우(時雨)할아버지는 절손되어 우리 집에서 대를 이어 주었으니 혈통(血統)으로 봐서

는 맏집을 제하고는 전부 군량골 생원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그 후손을 대표(代表)하는 주손이 안동 찬주, 경우로 이어진 것이다.

작은 형님이 군량골 산주 명의를 주손 앞으로 꼭 돌려 놔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까운 조상을 받드는 일은 우리의 근본이지만 이와 함께 앞으로는 우리의 상징적(象徵的)의미와

정체성을 바르게 찾아야 한다. 우리 모두를 있게한 이 할아버지는 찬주와는 칠대조(7代祖)가 되고

경우는 8대조가 되는 직계(直系)주손임을 새겨 주인의식(主人意識)과 자긍심을 갖고 묘소와 군량

곡을 천추만대 이어갈 기틀을 잡으면서 잘 과리 보존하길 바란다.

 

또 300여년전에 선조께서는 이 고을에 정착 개척하시면서 소망이 후손의 번영일 것이다. 이 소망

이 성취된 것은 18세 (師德) 가선대부 할아버지때 비롯됐지만  19세(時雲) 우리 직계 생원 할아버

지의 후예(後裔)만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성하여 그 대부분을  찾이하고 있으니 이 만큼이면 명당

(名堂)에 모신 발복이라고 할 수 도 있지 않을까?......

또한 이 고을 출신 박씨들의 중흥조(中興祖)로 추앙(追仰)을 받아도 남을 어른이시다.

 

아버지 살아 계실때 괄시 못할 친지의 간청에 못이겨 산의 묘자리 하나를 양도 했는데 등기해 갈때 너무 큰 면적을 가져 갔다고 불평히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에 내 출생전의 이야기가 많은데 그것은 족보를 근거한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