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혹독(酷毒)했던 시련(試練)

bsk5865 2021. 10. 18. 22:01

혹독(酷毒)했던 시련(試練)

 

나도 세상에 나와서 남들 처럼 직장 가지고 3남매 키우며 살았었다.  

순 촌사람인 내가 군소재지에서 크는 아이들과  같이 부침(浮沈)을 겪으면서 한 세상 잘

보냈었다.

군 소재지에서는 그래도 아이들 학교 성적은 늘 주위의 호평을 받았고 기억 해 주는이도 

많았었다.

 

이렇게 살다 인생역정(人生歷程)의 내리막 길을 만나 낙오자(落伍者)가 되어 빈손 맨주먹

으로 객자에 훌러 들어왔다. 

오고 보니 막막했던 심정은 필설(筆舌)로는 모두 표현 못한다.

월새방에서 주인 눈치 볼 것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부자유스런 주거 공간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식구 모두 참 많은 고생을 했었다. 봉화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을 반찬

값이라도 보탠다고 했으니......

 

대구에서 인생살이를 새로 배와 나가야 했다. 굴러 떨어진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나 새다짐

으로 시작 했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생활력은 여자가 강하다는 것!  절대로 자식하고 먹고 살아야 한다.  이것

만은 철두철미 했었다. 좌절은 없는 것이다.

 

월세방에서 시작해서 전세방으로  그리고 아파트로 정주할 때까지 만5년 동안 이사를 일곱번

옮겨 다녔었다. 아는 곳 없는 객지에서 복덕방 찾아 다니면서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하기란 힘

들고 구했다고 해서 가 보면 도저히 입주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집이 해결 됐다고 한들 

또 뭘 먹고 사는가?

 

생활조건인 의(衣), 식(食), 주(住) 세가지의 기본이 무너진 참담한 현실이 싫었고, 부끄러웠고,

미웠다.  지켜 왔던 자존심 따위는 사치스러운 것으로 퇴화해 버렸었다.

일거리를 찾아 봤지만 신통치 못하고, 그래도 놀고 있을 수 없어 나가 보고......

 

고향 친지를 비롯하여 여러 계층의 지인(知人)들도 만나 봤었다. 무연고지에 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 봤을 것이다.

반응은 각양각색 이었지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대방도 유쾌한 만남은 못 됐을 것이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것도 때와 운이 좋아서 되는 것이지 각박힌 도시생활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 같이 기술도 없고 나이고 많은 처지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한다는 강박(强迫)속의 하루하루는 불안초조의 연속이었고 생존을 위한

최후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힘들었던 것은 망망대해(茫茫大海)의 한점 고도(孤島)에 버려진것 같은 외로움이요,  어디

한곳 손 내밀면 잡아주고 아픈 내마음 보듬어 줄 인정의 그리움이었다.

 

이렇게 열악(劣惡)한 환경 속에서도 내 인생 새로운 풍년의 간절한 소망을 안고 일모작(一毛作)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모작(二毛作)의 씨를 부지런히 뿌렸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