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顧輯草案

맏이의 출가(出嫁),인심은 조석변(朝夕變)

bsk5865 2021. 10. 19. 21:28

맏이의 출가(出嫁),인심은 조석변(朝夕變)

 

대구 오기 전 1981, 5, 17, 맏딸은 출가(出嫁)시켰지만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온다.

 

정치권의 선거구 축소 조정에 따라 사무국 요원도 조정됐었다. 그 지침(指針)에는

나는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이를 어겨 나를 나가게 만들고 대신 전직(轉職)을 (XX면

면장(面長)  권했다.  이를 사양했지만 뒤에 딸의 취직을 희망해 두었었다. 마침 마땅한

자리가 었었는데 그것 마저 불발로 끝나 그들을 믿었던 나를 원망하고 잊어 버렸었다.

지난 후에 생각해도 모두 내 맘 같지 않았고 자신들 실속만 채우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전직(轉職)을 사양한 것은 너무 옹졸한 처신이었다.  어쩻던 몸을 낮추어야

할 때인데 인사에 대한 불만, 패배(敗北)해서 쫓겨난다는 쓸데 없는 자존심 때문에 다음에

더 좋은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가족의 고생만 시켰었다.

 

까닭으로 큰딸은 일찍 집에서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었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셈이다.

아이들 진심으로 잘 돌봐 주고 정성을 다하니 입소문으로 날로 아이들이 모여들고  호평도

들었었다. 여기서 알뜰히 저축한 것이 후에 딸의 결혼자금이 됐으니 애비로서 할말이 어디

있는가?  그저 그 딸이 예쁘고 장하다는 생각 뿐이았다.

 

결혼식 날에 내빈께는 기념품으로 인사를 대신 했지만 멀리서 온 고향사람들은 점심대접을

해야 한다고 작은 형님이 쌀을 가지고 오셨기에 비빔밥으로 대접했었다.

 

나는 봉화에서 4반세기(半世紀)이상을 살았고 인연도 많은 것으로 자부(自負)했었다.

학교에 있을때는 좋은 일, 궂은일 앞장 서서 베풀며 살았고, 전직(轉職)하고는 남의 아픔을

치유하고 도움을 줘야 할 자리였기에 더욱 그러한 생활로 인간적 유대를 맺었었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가깝게 지내던 사람도 많았고 특히 길흉사는 알뜰히  찾아 다녔다.

그런데 개혼(開婚)인 내 딸의 예식장엔 안보이는 사람이 있어 몹씨 서운한 생각이 들었었다.

 

정국(政局)이 (1979) 10,26을 거쳐 새로운 정권인 제5공화국이 탄생한 시국 탔일까?

그 시국(時局)에 나는 전정권의 종사자일뿐인데 이단자(異端者)로 보고 멀리 하는건가?

 

봉화서 치룬 내 동생 결혼식때는 올 사람 모두 와 주었었다.

그때 나는 각기관장을 회원으로 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해 왔고 , 이곳 언론의 역할도 맡아

지역사회를 위해 힘 쓰는등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했던 시절이었다.

 

딸의 경우에는 정치집단에 있다가 10,26 사건으로 제4공화국이 끝나 신진세력에 밀려난

뒤 였으니.....이것이 좁은 이곳의 인심의 흐름이라면 서글픈 생각 뿐이었다.

그 처지가 상반(相反)되니 그에 따라 인심도 대조 되는듯 했다......

그래서 "인심이란 조석변(朝夕變)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맏딸은 잘 견디었고 지금은 대구에서 안정적인 중산층으로 부모를 잘 돌봐 주면서

하고 싶은일 해가며 즐겁게 살고 있다.

"맏이 따라갈 아우 없다"는 옛말과 같이 동생들 잘 이끌고 가족의 화목을 다지고 있다.

맏딸의 오늘날은 고생 끝에 얻은 축복일 것이고 고생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고맙고 감사한 응보(應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