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里の秋-川田正子///歌の背景

bsk5865 2012. 9. 21. 09:42

보낸사람: 소담 엔카 운영자 12.09.21 06:34

 

里の秋-川田正子///歌の背景(D)|★....演歌 게시판

黃圭源  http://cafe.daum.net/enkamom/KTiH/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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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の秋-川田正子

作詞 斎藤信夫 作曲 海沼 実


静かな 静かな 里の秋
お背戸(せど)に木の実の 落ちる夜は
ああ 母さんと ただ二人
栗の実 煮てます いろりばた


明るい 明るい 星の空
鳴き 鳴き 夜鴨(よがも)の 渡る夜は
ああ 父さんの あの笑顔
栗の実 食べては 思い出す


さよなら さよなら 椰子(やし)の島
お舟に ゆられて 帰られる
ああ 父さんよ 御無事でと
今夜も 母さんと 祈ります


歌の背景

1945年8月15日 日本은 포스담宣言(Potsdam Declaration)을 받아들여 連合国에 降伏합니다. 敗戦과 함께 南方이나 大陸各地에서 軍人 軍属 民間人들이 続々 日本으로 돌아 옵니다만 그들은 많든 적든 몸과 마음에 傷處를 입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年末 日本放送協会(NHK)는 그런 歸還兵이나 歸國 民間人들을 慰勞하는 特別 Radeo編成을 企画하고 그 中에서 흘러간 노래의 制作을 “音羽ゆりかご会”의 主催者인 作曲家 海沼実(かいぬま みのる)에 依頼하였습니다.

放送 日은 南方에서의 歸國船이 神奈川県 浦賀港에 入港하는 12月24日로 決定했습니다.

海沼에게 曲의 依頼가 있었던 것은 不過 1週間前이였습니다 焦燥해진 海沼는 어덴가 適当한 詩는 없을까 하며 낡은 童謡雑誌를 뒤지면서 次例次例 찾아 보았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이 斎藤信夫(さいとうのぶお) 作 “星月夜” 라는 童謡였습니다. 그 이름을 보자 마자 海沼는 그의 作者를 想起시켰습니다. 海沼가 또 無名이었던 1937年 頃 斎藤信夫가 있는 千葉県의 成東(なるとう)로 찾아가 童謡에 關한 서로의 생각을 討論한바 있었습니다.

場所는 音羽ゆりかご会의 練習場所인 東京 護国寺内의 幼稚園이었습니다. 斎藤는 小学校教師를 하면서 부지런히 童謡를 作詩하고 童謡雑誌에 投稿하고 있었습니다. 그 雑誌에서 海沼의 이름을 알고 興味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星月夜”를 보던 海沼는 이 詩라면 하는 直感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詩 그대로는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1節과 2節에는 母子가 밤(栗)알을 삶으며 出征中인 父親을 생각하는 内容이고 3節과 4節은 軍国主義的인 内 容이였기 때문입니다.

變更前의 歌詞를 紹介하면

3節에 きれいなきれいな椰子の島/しっかり護って下さいと/ああ父さんのご武運を/今夜も一人で祈ります

4節에 大きく大きくなったなら/兵隊さんだようれしいな/ねえ母さんよ僕だって/必ずお国を護ります

였는데 여기에서 海沼는 이 部分을 修正하기로 하고 斎藤宛에게 “スグオイデコフ、カイヌマ”라고 電報를 칩니다. 그 때 斎藤는 小学校(當時에는 国民学校라는 名称) 教師를 그만 두고 집에서 번둥번둥 놀고 있었습니다.

戦争 中에 斎藤도 다른 教師와 같이 日本의 軍国主義를 꾸임 없이 믿고 學生들에게 信州不滅 이라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星月夜”를 쓴 것도 太平洋戦争이 始作되려는 1941年 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神州가 敗한 以上 教師로서 많은 어린이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되어 斎藤는 教師를 辭職한 것입니다. 教師를 그만 뒀지만 當時에는 失業者가 넘치는 世態에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없이 버둥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海沼로부터 電報를 받은 것은 그런 状態의 때였습니다. 斎藤는 用件도 提示하지 않고 불러낸다고 多少 不快해 했습니다만 어차피 하는 일 없으니까 나가보기로 했습니다.

찾아온 斎藤에게 海沼는 事情을 말하고 3節 4節의 修正을 依頼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簡単하리라고 받아 들렸지만 詩의 Thema를 根本的으로 変更하는 것으로 좀처럼 붓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것 저것 苦悶하는 동안 드디어 放送 日이 다가 왔습니다.

斎藤는 唐惶하여 3節만을 고쳐 NHK에 急히 달려가 童謡歌手인 川田正子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海沼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題目은 海沼의 注文 데로 “里の秋”로 変更하고 曲은 이미 完成되어 海沼는 正子에게 詩를 넘기고 練習에 들어가 얼마 뒤 放送에 臨하게 되었습니다.

特別 編成인 “外地引揚同胞激励の午后”라는 題目으로 1945年12月24日 午後1時45分부터 放送되기 始作했습니다.

“里の秋”의 反應은 놀라왔습니다. 正子의 노래가 끝나자 “スタジオ内はシーンと静まり返り、その場にいた全員が心が浄化されるのを感じた”라고 放送에 立会했던 스텝은 말하고 있습니다.

放送이 끝나자 放送局内의 電話가 一齊히 울리고 다음 날 以後에도 電話와 感想의 便紙가 殺到 했습니다. 이 노래 한 曲이 이토록 感激을 일으킨 것은 NHK에서도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 後 斎藤는 川田正子의 家庭教師로 生計를 꾸려나가면서 海沼와 짝이 되어 叙情的인 作品을 얼만인가를 만듭니다. 그의 하나가 名作”蛙の笛”입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教師였던 斎藤는 프로의 作詞家가 되는 길을 버리고 教職에 復帰합니다. 1982年 千葉県 成東町의 城跡公園의 一角에 斎藤信夫를 顕彰한 “里の秋”의 歌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