サラン~愛は此処に~-西尾夕紀 作詞 西條みゆき 作曲 伊藤薫
あなたと恋に落ちて 心ときめくままに もうどれくらい そうどれくらい 歩いてきたかしら
巡る季節の中で 愛を確かめながら 今この瞬間(とき)を そうこの瞬間(とき)を 二人は生きている
運命のいたずらが 幸せを奪っても
サランヘヨ(愛してる) カジマ(行かないで) 愛は此処(ここ)に 時が二人を 離しても 永遠(とわ)に あなたへとサラン(愛)
ともにこの世に生まれ 愛する人の側で ただひたすらに そうひたすらに いのちを重ねてる
二人して歳を取り 同じ朝 迎えたい
サランヘヨ(愛してる) コマウォ(ありがとう) 愛の日々を ひとり残して 行かないで 届け あなたへと サラン(愛)
サランヘヨ コマウォ 愛は此処(ここ)に 胸に溢れる この想い 永遠(とわ)に あなたへとサラン(愛)
葛飾北斎と歌川広重 日本을 代表하는 두 명의 画家를 소개 합니다. 葛飾北斎(かつしかほくさい)와 歌川広重(うたがわひろしげ:安藤広重(あんどうひろしげ) 라고도 한다)는 모두 江戸時代 後期인 18世紀 後半에서 19世紀 中半 사이 日本의 風俗画인 浮世絵(うきよえ)를 製作한 画家로 北斎가 그린「富嶽三十六景(ふがくさんじゅうろくけい)」. 이나 「北斎漫画(ほくさいまんが)」広重가 그린 「東海道五十三次(とうかいどうごじゅうさんじ)」「江戸名所百景(えどめいしょひゃっけい)」等은 日本뿐만 아니라 海外에서도 높은 評價를 받았습니다.
葛飾北斎 葛飾北斎는 1760年,지금의 東京인 江戸에서 태어났습니다. 14歲에 木版畵 彫刻을 始作했고 18歲에 有名 浮世絵에 作家의 弟子가 되어 그림의 世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器量이 뛰어나 곧 ‘그림의 천재’라는 評을 받았지만 浮世絵의 畵法에만 滿足하지 못하고 스승의 許諾 없이 다른 畵法을 배워 破門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림에 對한 熱情은 막을 수가 없어서 “굶어 죽더라도 마지 막까지 그림을 그리겠다"라며 온縱逸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38歲 무렵,北斎는 네덜란드의 風景 版畵에 感銘을 받아 ‘風景畵’에 强한 魅力을 느낍니다. 그러나 가난했던 그는 自身이 그리고 싶은 風景畵가 아니라 冊의 揷畵, 俳優畵,美人畵 等 生計를 꾸리기 爲한 그림을 그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54歲 때 庶民과 動植物의 多樣한 모습을 그린 『北斎漫画』를 發表해 많은 人氣를 얻었는데 그 中 一部가 西洋에 輸出되는 陶瓷器의 包裝紙로 使用되면서 偶然히 西洋에 進出하게 됩니다.
北斎의 그림을 본 프랑스 畵家들은 纖細한 스케치와 아름다운 色彩에 놀랐고 여기에서 ‘日本主義(Japonisme. 日本의 影響을 받은 유럽 美術의 風潮)’ 가 誕生하게 됩니다.
北斎는 人物畵,風景畵,歷史畵,妖怪畵,百人一首(ひゃくにんいっしゅ. 시인 100名의 詩를 한 首씩 모은 것. 또는 詩를 적은 카드) 그림 等 3万余 点의 作品을 남 겼고 모든 장르에서 最高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多樣한 分野의 그림에 挑戰하며 無慮 30番이 나 이름을 바꾸었는데요. 자신의 그림을 客觀的으로 評價 받기 爲해 每番 新人 畵家의 位置에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北斎すれば富士山 北斎의 最高 傑作은 70歲가 넘어 發表한 『富嶽三十六景』으로 旅行을 떠나 多樣한 地域에서 바라 본 富士山의 모습에 感動해 富士山을 어디에 어떻게 配置하면 가장 效果的인지 徹底하게 考慮해 그린作品이라고 합니다.
이 作品 때문에 ‘北斎이라면 富士山,富士山이라면 北斎’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는데요. 題目에서 알 수 있듯이 勿論 富士山이 中心인 作品이었지만 그 속에는 庶民의 生活도 纖細하게 描寫되어 있어 江戸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北斎는 그 後에도 繼續 富士山을 그려 74歲에 「富嶽百景(ふがくひゃっけい)」을 完成합니다.
北斎는 晩年에 自身의 그림 技法을 後世의 畵家에게 伝하기 爲해 그림 道具의 使用法이나 遠近法에 關한 책을 쓰거나 標本集을 그리기도 했는데요. 1849年 4月, 죽음을 앞둔 그는 “적어도 10年,아니 5年만 더 살 수 있다면 진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라고 恨歎하며 88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습니다.
歌川広重 歌川広重는 1797年,江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的부터 그림에 才能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13歲에 父母님을 잃고 지금으로 치면 消防官 일을 하면서 15歲부터 浮世絵를 배우기 始作해 27歲 때 浮世絵 作家로 獨立했습니다. 初期 作品은 當時 流行하던 俳優畵나 美人畵가 많았지만 36歲에 轉機가 찾아옵니다.
徳川幕府(とくがわばくふ:江戸幕府(えどばくふ)라고도 함)에서는 每年 王이 있는 京都의 朝廷에 말(馬)을 바쳤는데,広重는 그 行列과 함께 東海道(とうかいどう)를 往復했고 이듬해 이때의 스케치를 基礎로 制作한『東海道五十三次(とうかいどうごじゅうさんじ)』를 發表해 爆發的인 人氣를 얻었습니다.
東海道는 江戸幕府를 세운 徳川家康(とくがわいえやす)가 支配 體制를 强化하기 爲해 만든 다섯 個의 道路 中 하나로 江戸와 京都를 連結하는 交通의 核心이었습니다. 이 길에는 旅行者들이 休息을 取하고 食事를 할 수 있는 53個의 驛站이 있었는데 広重는 江戸의 日本橋(にほんばし)를 出發해 53個의 驛站을 거쳐 京都의 三条大橋(さんじょうおおはし)까지 가는 旅程을 55張의 作品으로 表現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東海道五十三次』는 遠近法을 使用해 보는 이들이 그림 속의 바람이나 비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斬新한 作品이었는데요. 旅行을 다니기 어려웠던 時節,이 畵集은 庶民들에게 情報를 提供하는 ‘旅行 寫眞集’의 役割도 했다고 합니다.
広重는 北斎를 무척 尊敬해 가르침을 請 하려고 종종 집을 訪問했었다고 하는데요. 約 40年의 나이 差가 있지만 두 藝術人이 그림을 通해 交感 했던 모습을 想像하면 왠지 뭉클해집니다.
그는 『東海道五十三次』 외에 『木曽街道六十九次(きそかいどうろくじゅうきゅうじ) 』,『名所江戸百景(めいしょえど百系)』 等 各地의 名所를 그린 風景畵를 많이 남겼으며 浮世絵 外에 붓으로 直接 그린 作品도 꾸준히 發表했습니다. 그리고 1858年 65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는데요. 死因은 當時 流行했던 콜레라라고 伝해집니다.
広重ブルー 유럽에서는 広重의 大膽한 構圖와 ‘재팬 블루’또는‘広重ブルー’라고도 불리는 靑色,特히 藍色 (indigo)의 아름다움을 높게 評價했습니다. ‘広重ブルー’는 19世紀 後半 프랑스를 中心으로 展開된 印象派나 新 藝術主義 作家에게 많은 影響을 주어 北斎와 함께 日本主義가 流行하는데 크게 貢獻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