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国の丘-鶴田浩二 作詞 増田幸治 補作詞 佐伯孝夫 作曲 吉田正 元唱 竹山逸郎 中村耕造
一 今日も暮れゆく 異国の丘に 友よ辛かろ 切なかろ 我慢だ待ってろ 嵐が過ぎりゃ 帰る日も来る 春が来る
二 今日も更けゆく 異国の丘に 夢も寒かろ 冷たかろ 泣いて笑うて 歌って耐えりゃ 望む日が来る 朝が来る
三 今日も昨日も 異国の丘に 重い雪空 日が薄い 倒れちゃならない 祖国の土に たどりつくまで その日まで
歌の背景 第二次大戦의 막판에 日蘇中立条約을 破棄하고 満州를 侵攻한 蘇連軍에게 日本軍은 降伏했습니다. 武装이 解除된 日本軍将兵은 在満의 民間人이나 当時 日本国籍이었던 韓國人과 함께 蘇連 領内의 収容所로 移送되었는데 一般的으로“시베리아抑留”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시베리아抑留라고 하지만 収容處는 시베리아뿐만이 아니고 몽고리아나 北韓 그리고 中央아시아 유럽러시아의 各地에 미치고 있었습니다.
収容者数는 約65万人이라는 것이 定説로 되어 있습니다만 実際로는 約107万 名이었다 라고 하는 記錄도 있습니다.
収容된 日本人들은 劣悪한 住居環境과 粗悪한 食事 過酷한 強制労働에 휘달렸습니다.
労働은 建築이나 土木建設의 人夫 木材伐採 等이었습니다만 노르마(norma =割當된 勞動의 基準)가 賦課되어 노르마가 達成되지 않으면 減食되거나 欠食되는 過酷한 措置가 뒤 따랐습니다.
또한 定期的으로 共産主義 洗腦教育이 行하여지고 反・非共産主義的인 것이 發見되면 共産主義에 感化된 同胞들로부터 人民裁判을 받거나 린치(lynch)를 當해야 했습니다.
連日 過酷한 作業으로 収容期間中에 死亡하는 者는 収容人数의 1割에 가까운 約6万名에 達했다고 합니다.
단 美國의 研究者 “윌리엄•닌모”의 調査에서는 実際 死亡者는 約34万 名으로 確認되며 또 다른 記錄에는 約37万5000名이란 調査結果도 있습니다.
収容者数를 約107万 名으로 하면 犠牲者는 그의 3分之1以上에 達하는 것으로 되는군요
収容者의 帰還은 1947年에 蘇連과의 国交가 回復되는 1956年에 걸쳐 次次 進行되었습니다만 共産主義教育에 反抗的이었던 사람의 帰還은 相當히 늦어졌다고 伝해 지고 있습니다.
抑留로부터 帰還者에 依해 日本에 傳해진 것이 몇 個가 있는데 前述한 노르마(norma)란 말과 노래 運動 等이 그 例 입니다 “異国の丘”도 그의 한 個입니다.
1948年 8月1日NHK의 人気프로그램인 “のど自慢素人演芸会”에 한 사람의 復員兵(戰爭이 끝나 집에 돌아온 兵士)이 出演하여 훌륭하게 鐘을 처 울렸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中村耕造라는 人物로 노래한 것은 作詞・作曲者不明의 “昨日も今日も”라는 노래였습니다.
望郷의 쓰라림을 切々히 소리 높여 부른 이 노래를 Victer 가 놓칠 리 없지요 佐伯孝夫에게 補 作詞를 清水保男에게 編曲을 그리고 中村耕造와 当時의 人気歌手・竹山逸郎이 함께 노래를 불러 Recording 했습니다.
같은 해 9月 “異国の丘”로 이름을 고쳐 Record가 発売되자 마자 瞬息間에 全国에 大流行 되어 어른에서 아이들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불러대고 NHK나 各地의 “のど自慢大会”에서도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続出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만든 노래인가 不分明했습니다만 드디어 吉田正가 自稱해 나오고 作詞는 増田幸治 作曲은 吉田正으로 밝혀 졌습니다.
吉田는 1948年8月에 시베리아에서 帰還하였으나 大流行한 이 노래가 自身이 만든 노래는 点에 實感을 못 느껴 自稱해 나오기를 꺼렸다고 하는군요.
1950年4月에는 増田幸治도 帰還하고 노래의 経緯가 모두 밝혀졌습니다.
吉田正과 増田幸治는 시베리아•블라디보스토그 郊外의 알춈収容所에 함께 収容되어 있었습니다 中村耕造도 같은 収容所 있었을 것으로 思料됩니다만 두 사람의 이름을 記憶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吉田가 戦時 中에 만든 “大興安嶺突破演習の歌”라고 하는 軍歌를 紹介한바 増田가 그것에 “俘虜(ふりょ)の歌える”라는 歌詞를 부쳐 副題를 “異国の丘”로 하였습니다.
그 뒤 増田는 이 曲을 発表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異国の丘을 発表한 것은 収容所의 演芸会였습니다. 合唱하고 있으면 가슴이 막혀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가 울었습니다. 그 以後 作業을 나가거나 돌아 올 때 그리고 日夕点呼 時에는 모두가 흥얼대며 불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서로가 激勵하여 殺伐했던 雰囲気는 차춤 믿음으로 變해가고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最初의 겨울이 끝나는 1946年의 3月頃이 었습니다”
노래가 單純한 娯楽以上의 힘을 가질 수 있다라고 하는 顕著한 証拠가 여기에 있습니다.
吉田는 Victer로부터 専属作曲家의 提議를 받고 以後 數많은 히트 曲을 連発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事實 그대로입니다.
위에 글은 결코 日本軍國主義를 讚揚하려는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나라의 爲政者의 失政이 戰爭으로 이어지고 다시 敗戰의 소용돌이에 罪 없는 많은 國民이 이을 甘受해야 하는 어려움을 우리 모두가 看過해서는 아니 될 것으로 思料되는군요.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