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国土佐を後にして-ペギー葉山 作詞 武政英策 作編曲 武政英策
一 南国土佐を 後にして 都へ来てから 幾歳(いくとせ)ぞ 思い出します 故郷の友が 門出に歌った よさこい節を 土佐の高知の ハリマヤ橋で 坊(ぼん)さんかんざし 買うをみた
二 月の浜辺で 焚火を囲み しばしの娯楽の 一時を わたしも自慢の 声張り上げて 歌うよ土佐の よさこい節を みませ見せましょ 浦戸をあけて 月の名所は 桂浜
三 国の父さん 室戸の沖で 鯨釣ったと 言う便り わたしも負けずに 励んだ後で 歌うよ土佐の よさこい節を 言うたちいかんちゃ おらんくの池にゃ 潮(しお)吹く魚が 泳ぎよる よさこい よさこい
歌の背景 이 노래는 1959年에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노래의 히트에는 TV普及이 密接하게 얽혀 있군요 日本에서 TV放送이 始作된 것은 1953年2月1日입니다만 그 해에 受像器 台数는 不過 3600台 程度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100万台를 突破한 것이 5年 後인 1958年5月이었는데 그리고 不過 1年 後인 1959年4月에는 一挙에 倍가 増加하여 200万 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主要한 契機는 皇太子의 結婚과 結婚 퍼레이트를 보기 爲해 高額을 아끼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受像器를 購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TV의 急增을 豫測하고 NHK나 民放의 地方TV局의 開局이 서두르는 狀態였습니다 1958年 末 NHK高知放送局의 開局을 記念하여 高橋圭三 司会의 노래프로그램 “歌の広場”이 放送되었으며 그 中에 재스 歌手 ペギー葉山가 부른”南国土佐を後にして”가 크게 反響을 일으켜 受像器의 普及과 함께 크게 便乘되어 히트가 되었다라는 것이군요
実은 約3年前에 鈴木三重子의 民謡調의 레코드가 나와 있었습니다만 當時에는 話題의 對象이 되지 못했답니다.
TV의 急速한 普及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 때부터 高度의 経済成長이 始作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밝은 展望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런 世態에 ペギー葉山의 爽快한 歌唱力이 어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元歌가 따로 있습니다 高知民謡”よさこい節”를 읽고 戦前부터 이 고장에서 불려지고 있었던 노래로 “南国 節”이라던가 “よさこいと兵隊” 等 몇 個의 “봐리에숀”이 있었습니다.
中日戦争中 四国混成部隊(通称「鯨部隊」)가 駐屯해 있었던 의 兵士들이 他県 出身者를 가르치게 된 것부터 戦後에 四国 一円에 퍼져 갔습니다.
술 座席에서 이 것을 들고 마음이 끌린 이가 作曲家인 武政英策이 였습니다 空襲으로 大阪의 自宅은 불타고 前妻의 因縁으로 南国 市에 疎開하였던 武政은 戦後에도 大阪에 돌아오지 않고 高知에서 楽団을 指揮하는 等 音楽活動을 繼續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래를 어떻게 發表할까를 苦悶하였습니다 만 歌詞도 멜로디 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조곰씩 달라 그대로는 作品化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롭게 歌詞를 쓰고 採譜한 멜로디를 一部 살려 自身의 노래로마무리 하여 完成시킨 것이 1952年 鈴木三重子의 노래를 거쳐 ペギー葉山의 노래로 이어져 놀랍게 꽃이 피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