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君の名は-織井茂子///歌の背景

bsk5865 2013. 4. 22. 10:39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4.22 07:28

 

君の名は-織井茂子///歌の背景(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3247 

MP3 ダウンロード


君の名は-織井茂子

作詞 菊田一夫 作曲 古関裕而


君の名はと たずねし人あり
その人の 名も知らず
今日砂山に ただひとりきて
浜昼顔に きいてみる


夜霧の街 思い出の橋よ
過ぎた日の あの夜が
ただ何となく 胸にしみじみ
東京恋しや 忘られぬ


海の涯に 満月が出たよ
浜木綿(はまゆう)の 花の香に
海女(あま)は真珠の 涙ほろほろ
夜の汽笛が かなしいか


歌の背景

戦前의 “愛染かつら”에 匹敵되는 메로 드라마의 傑作 “君の名は”의 테마 曲입니다 “君の名は”는 1952年4月10日 NHK라디오에서 放送이 始作되어 1954年4月10日까지 繼續되었습니다 毎回 드라마 첫머리에 나오는 来宮良子의 narration“忘却とは忘れ去ることなり。忘れ得ずして忘却を誓(ちこ)う心の悲しさよ”가 잊어지지 않습니다.

太平洋戦争 末期인 東京 大空襲의 밤 燒夷彈이 灼熱하며 내려오는 가운데 一面識이 없는 氏家真知子와 後宮春樹는 서로 도와 여기저기 避해 다니는 동안 銀座 数寄屋橋에 겨우 到着합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生きていたら半年後、それがだめならさらに半年後にこの橋で会おう”라고 約束합니다.

春樹는“君の名は?”라고 묻습니다만 真知子는 對答이 없는 채 떠납니다 多樣한 멜로드라마 안에서도 屈指의 名 場面입니다.

여기에서 九州로부터 北海道에 이르는 全国을 舞台로 한 真知子와 春樹의 崎嶇한 運命의 엇갈림은 繼續됩니다.

最終回에 重病으로 激烈하게 헐떡이는 真知子의 머리맡에 春樹가 急히 달려 올 것인가 아닌가에 손에 땀을 쥐고 들었다는 後談들 입니다 真知子는 저리도 春樹를 좋아했는데 왜 意志를 分明 밝히지 않았는가 全國을 찾아 다니는 費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에 조금도 疑問이 가지 않았습니다.

1953年~1954年에 松竹에서 岸恵子와 佐田啓二을 主演으로 한 映画를 만들어 크게 히트하였습니다 TV時代가 始作되면서 몇 번인가 TV드라마化 하였습니다만 時代가 지날 만큼은 히트되지 않았습니다.

特히 1991年 NHK가 大大的인 宣傳을 始作한 아침의 TV小説에서는 回를 거듭할수록 視聴 率이 떨어 졌습니다 人気를 挽回하기 爲해 次例로 方針을 바꾼 結果 世紀의 엇갈림의 메로 드라마가 끝날 무렵에는 “奥さん、今晩のおかず何になさる?”“うちはコロッケ(croquette)よ” 바람의 홈 드라마가 되어버렸습니다.

드라마는 두 사람을 맺어주는 段階에서 끝이 납니다 “君の名は”는 “鐘の鳴る丘”와 함께 劇作家 菊田一夫(1908~1972)의 代表作입니다 그 時期에 少年少女期나 青春期를 보낸 사람들에게 菊田一夫라는 이름은 잊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거기에서 그의 追憶이 조금은……

菊田一夫는 親父母의 얼굴도 모르는 체 여러 養父母 사이를 돌면서 小学校를 卒業도 하지 못한 체 大阪에 丁稚(でっち=商家 等에서 期間을 定하고 심부름 하는 少年)로 나갔습니다 神戸의 古物商에서 奉公(고용살이)으로 있었을 때 文学에 뜻을 두고 17歳인 때 古物商을 그만 두고 東京으로 向합니다.

그러나 名古屋까지 왔을 때 손에 돈이 다 떨어져 어쩔 수가 없어 바다에 뛰어들러 自殺도 決心해 봤습니다만 어차피 죽을 바엔 아주 좋아하는 映画 한便이라도 보고 죽자 라고 생각하고 없는 돈을 몽땅 털어 映画館에 들어 갔습니다.

그 때의 上映中인 映画는 프랑크 보제지監督의 “第七天国”이 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淸掃夫가 누나에게 虐待를 받고 있는 少女를 도와 함께 살아가는 內容으로 그 後 그는 出征하여 戦死되어 幽霊이 되어도 少女를 돕는다는 스토리의 映画입니다.

그 는 이것을 보며 周邊사람들이 깜짝 놀랄 程度로 울었다고 합니다 울면서 映画館을 나왔을 때는 죽을 마음이 모두 살아진 뒤였다고 합니다.

그 後 어떻게 하든 旅費를 만들어 東京으로 向하였습니다 東京에서는 文学동아리에 依支하여 佐藤八郎의 直屬 弟子가 됩니다.

그 時期에 佐藤八郎에게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간난아기가 울기 始作하면 佐藤八郎는 잘 수가 없어 간난아이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木枯らしの吹いている夜などは、辛くて、赤ん坊といっしょに泣きたい気持ちだった”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後 菊田 一夫는 佐藤八郎의 紹介로 浅草国際劇場의 文芸部에 들어가게 되고 以後에는 順調롭게 劇作家의 길을 걸어가면서 어느 程度는 餘裕 있는 生活을 營爲하였습니다 이로서 佐藤八郎가 菊田一夫의 大 恩人이 였다는 데는 틀림이 없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