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戰爭函

[6,25槪要] 同族相殘의 悲劇' 6.25 事變이 일어 난지가 벌써 63돌

bsk5865 2013. 6. 24. 20:14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06.24 16:30

 

'同族相殘의 悲劇' 6.25 事變이 일어 난지가 벌써 63돌이 됩니다.|★....일반 게시판

둔치 |  http://cafe.daum.net/enkamom/KWfw/10861 

이를 계기로 6.25 사변을 다시 한 번 되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용어 사용에 있어,

 6.25사변이 아닌 '한국전쟁'이라는 말은 사실을 햇깔리게 한다.

'이말은 쌍방이 밀고 당기다가 서로 의견 합치가 안되자 싸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도 아나운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고 있다. 이는 사실을 헷갈리게 하는 말로, 얼마쯤 지나면

 고교생들은 북침이 69%가 아닌 90%가 될 것 같아 매우 걱정이다.

 이는 또한 북한 애들의 의도된 선전선동에 말려드는 것 같아 매우 염려가 되기도 한다.

 

6.25 기습 남침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국군들은 다, 외출, 휴가로... 무장이 완전히 해제가 된 상태이고,

더구나 온 국민들은 휴일<일요일>을 맞아 곤히 잠든 새벽 4시.

김일성의 철저한 기만전술로 기습 남침을 한 동족상잔의 비극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는 UN을 비롯한 전 세계가 다 아는 이 전쟁을 헷갈리게 해서는 아니 된다.

 

한국 전쟁이라는 말은

북한 애들이 김일성의 6. 25 기습남침을 희석시키려

전교조 교사들과 종북 좌파들을 통해 퍼뜨리는 기만전술 책이 아닌가???

물론 그 원인을 잘 모르는 서양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렇게 쓸 수도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인 우리는 후세들의 교육차원에서라도 바르게 써야 하겠다.

이 용어는 좌파정권 시 부터 더 써 온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지 않은가???

 

6.25 사변은 북한 김일성이 일으킨 6.25 기습 남침인 것이 사실이며

'아래 글'을 보면 더 명확해 진다.

그당시 나는 연연생의 세째로 11살...,

고향을 北에 두고 눈 날리는 그 추운 겨울, 1.4 후퇴 때

아버지는 지식인이라고 제주도로 이미 소개 되었고  

아버지 안 계신 열 식구가 처절한 고생을 하며 

피난을 온 실향민이라  더 가슴이 아프다...^-^

 

아래...

6.25 사변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의 남침으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이하 남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 사이의 전면전으로,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다.

요약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북한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해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 설을 정설로 보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지금까지도 '남한이 먼저 공격해 왔다는 북침 설'을 억지 주장하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남한과 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다양한 호칭들

남한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전쟁(六二五戰爭)[11], 좌파들이 즐겨 쓰는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사변(六二五事變),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전쟁(朝鮮戰爭,ちょうせんせんそう,일본)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 중국),등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요약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국의 통치자인 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모택동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루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고, 김일성이 그 후 수차례 그를 설득하여,

결국 중공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 하게 된다.

 

따라서 6.25 사변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에 의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사변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국에서도 1996년 7월 6.25사변의 기록을

북침에서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13]

결국, 구 소련문서의 공개에 따라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를 보면 더 정확히 알 수가 있다.

 

남한북한은 모두 상대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한에 있어 6.25사변은 적화 통일의 야욕을 가진 북한의 남침을 저지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방어전이며, 대한민국 국군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북한의 인민군이었다.

북한의 경우는 약간 다른데, 북한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고 남아있던

주한미군을, 남한에 대한 미국의 침략으로 간주, 북한 인민군의 명분상 주적은 미군이었다.

 

비교적 폐쇄적인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참전자 증언인, 구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 설은 매우 낮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 내에서는 대다수의 국민이 북한의 북침 설 주장을 허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도,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 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이후 남침 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경위; 1950년 6월 현재 북한은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

[15] 북한군은 소련제 T-34/85형 탱크 242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군은 한국 전쟁 직전까지 공군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정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L-4 연락기L-5 연락기 외에,

전쟁 발발 직전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로부터 구입한 건국기 10대를 추가한 것이 전부였다.

 

육군은 탱크와 기갑 차량은 전무했으며, 유일한 독립 기갑연대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정찰용으로 쓰인 37mm 대전차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1개 대대가 전부였다.

 

대전차화력으로는 보병용의 2.36인치 바주카포와 포병 병과의 57mm 대전차포가 있었지만,

T-34를 격파할 수 없는 무기였다(미국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한국군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스미스 대대가 치른 오산 전투에서야

자신들이 오판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현대전의 핵심 지원 전력인 포병은 105mm 화포와 4.2인치 박격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을 뿐더러

그나마도 사단 당 1개 대대만 배치되어 있었고, 포탄도 부족했다.

실제로 개성 -문산- 파주 축선을 방어하던 국군 1 보병사단은 전투 하루 만에 포탄이 바닥나 버렸던 것이다

(백선엽의 회고록 참조. 한국군 사단 포병이 미군 수준으로

4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 연대급으로 증강된 것은 전쟁 후반기였다).

 

전체적으로 남한군은 단지 15일 간 전투 행위 수행이 가능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 [16]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이승만은 "우리는 북한의 실지(失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17]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대 되었었다.

6.25가 터지자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도쿄에있는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이미 피난길에 올랐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21]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22]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으로 옮겼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이승만과 대한민국(남한) 정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24]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25]

 

서울시민 144만6천여 명 가운데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동포였고 나머지 20%인 8만명이 정부고관, 우익정객, 군인과 경찰의 가족,

자유주의자들로 추정된다.[26]

 

6월 28일 새벽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 중심부에서 목격되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은 전세가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이 될 때까지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이를 해석함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다.

2사단(사단장 박춘하(朴春河))은 의정부에서 북한군에 패퇴하고 남은 병력이 지금의 동작대교에서

광나루까지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27]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전라도까지 위협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28]

 

1950년~1953년 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한편 남한 정부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한국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어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기권) [29]

 

이러한 결의를 북한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남한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30]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31]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33]

 

7월 1일 영국프랑스는"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벨기에·캐나다·콜롬비아·프랑스·그리스·에티오피아·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필리핀·태국·터키·영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다.[34]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윌리엄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아래 부분은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에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고,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중국의 참전과 1.4후퇴<*우리는 이때 피난 나왔다>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국의 모택동을 만났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0만 이상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38도선 이북에서의 전술적 패배와 이어진 1.4 후퇴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중공군의 상당수는 내전에서 다져진 베테랑 병사들로, 중국공산당의 의용군은 인민의 지원과 게릴라전을

교리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군대였다.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인민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휴전 협정

유엔군과 남한군이 반격하였고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

(나중에 중국군의 반격으로 현재의 휴전선 부근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35]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이 소련을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 상황

대한민국:

• 전사 : 58,127명

• 부상 : 175,743명

• 행방불명 및 포로 : 80,000여 명[3]

미국:

• 전사 : 27,704명(비전투사망 8,370명 포함)

• 부상 : 79,526명

• 행방불명 : 4,442명

• 포로 : 6,656명 [4]

미국(중국 및 북한 추정치):

• 전사, 비전투사망, 부상, 행방불명, 전쟁포로 포함 : 390,000명 [5]

영국:

• 전사 : 1,109명 [6]

• 부상 : 2,674명

• 행방불명 또는 전쟁포로 : 1,060명 [7]

터키:

• 전사 : 721명 [8]

• 부상 : 2,111명

• 행방불명 : 168명

• 포로 : 216명

 

총계: 474,000명 이상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37]

 

남한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남한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남한)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남한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38]

북한

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60년대가 지난 이후

 대한민국(남한)과의 비교에서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39]

 

Ps;  1. 나는 좌우 이념은 개념치 않는다.

          따질 필요도 없다.

          다만, 민족의 비극인 동족간의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2.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