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の秋-石原裕次郎 作詞 萩原四朗 作曲 野崎眞一
一 秋が匂う この湖の水底に 金色の魚が 棲んでいるとか 恋も知らず 陽の目も見ずに 寂しかないか 目の無い魚よ
二 花も散るし 灯りもうるむ人の世に 生まれては見たが 独りぼっちさ 親も知らず 身寄りもなしに かいなく昏れる 旅路の秋さ
三 命かけた ほんとの恋も片思い 俺だけが窃っと 泣いてきたのさ 人の住まぬ やさしい国へ 行きたくなった 男の秋さ
돌아오지 못한 皇太子,英親王 日本에 留學하시는 韓國 皇太子 殿下께서는 일전 伊藤博文의 弔問使로 갔던 閔丙奭씨에게 이르시되 '지금에 太師가 작고하고 指導하는 사람이 아직 없으니 暫時 겨를을 얻어 故國에 돌아가 父皇 陛下께 問候 코자 하노니 이 뜻으로 德壽宮에 奏達하라' 하옵셨다더라."(大韓每日新報, 1909.11.12.)高宗은 公式的으로 6名의 夫人으로부터 8男2女를 보았지만, 大部分 어려서 죽고 成人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子女는 3男1女였습니다.
大韓帝國의 마지막 皇太子 英親王 李垠(1897~1970)은 高宗의 일곱째 아들이었습니다. 1907年 純宗이 皇位에 오른 뒤, 英親王은 그보다 20살 많은 義親王을 제치고 皇太子에 冊封되었습니다. 美國에서 工夫하고 돌아온 31歲의 義親王보다 11歲의 어린 英親王을 選好한 日本의 壓力에다, 明成皇后 死後 皇后 役割을 한 母親 純獻皇貴妃의 影響도 있었습니다.
皇太子 冊封은 幸運만은 아니었습니다. 伊藤博文은 皇太子의 日本 '留學'을 要求했고. '留學'은 名分일 뿐 事實上 볼모로 데려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高宗이 " 修學院(大韓帝國 皇族•貴族 敎育機關)에서 工夫하면 될 것을 멀리 日本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냐"고 反對했지만, 伊藤은 威脅과 說得을 번갈아 驅使하며 기어이 英親王의 日本 '留學'을 成事시켰습니다.
1907年 末 太子太師 資格으로 英親王의 留學길에 同行하면서 伊藤은 "每年 여름放學에 한 번씩 歸國할 수 있도록 周旋하겠다"고 約束했습니다. 英親王은 學習院(日本 皇族•華族 敎育機關)과 陸軍中央幼年學校, 陸軍士官學校를 거치며 日本 皇族의 一員으로 成長합니다. 伊藤은 英親王(왼쪽이 伊藤, 오른쪽이 英親王)에게 最高의 敎師를 붙여 공부시켰습니다.
1909年 東京을 訪問한 韓國의 日本觀光團 一行을 自己 邸宅으로 招待해 두 親孫子와 英親王이 함께 軍事體操를 하는 모습을 보이며 所爲 '日鮮融合'을 宣傳하기도 했습니다. 13歲 少年 英親王은 伊藤의 '特別한 待接'에 감춰진 政治的 陰謀를 理解하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伊藤의 死亡 消息에 큰 衝擊을 받았고, 3個月 동안 喪服을 입기도 했습니다. 애초의 約束과 달리 英親王은 伊藤의 死亡 以後에도 歸國을 許諾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1911年 7月 母親 純獻皇貴妃의 葬禮를 치르기 爲해 처음 歸國을 許諾받았습니다.
自身의 意思와 無關하게 日本 皇族 梨本(なしもと)親王의 딸 方子와 結婚했고, 日本軍 將校(日本 陸軍 步兵 中佐 時節)로 要職을 두루 거쳤습니다. 1940年 陸軍 中將으로 進級한 英親王은 第1航空軍 司令官으로 光復을 맞이합니다. 人質이 人質犯에게 同化돼 그들에게 同調하는 '스톡홀름 症候群'에 빠져버린 셈이었습니다.
光復 後 李承晩 政府는 英親王의 政治的 影響力을 憂慮해 그의 歸國을 막았습니다. 1961年 腦卒中으로 쓰러진 뒤 2年 後 朴正熙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의 周旋으로 歸國할 수 있었으나, 이미 몸은 半身不遂여서 들것에 실린 채 飛行機 트랩을 내렸습니다. 日本으로 떠난 지 56年 만의 永住 歸國이었습니다.
英親王은 腦血栓症으로 失語症에 시달렸으나 心身障碍者를 爲한 1966年 慈行會를 設立하였고 1967年에는 明暉園을 設立하였습니다. 1970年 7年余 病床生活을 하다가 生을 마쳤습니다. 墓地는 京畿道 南楊州市 金谷洞 洪裕陵 內에 있는 英園에 夫人 李方子 女史와 함께 잠들어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