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あざみの歌-伊藤久男///歌の背景

bsk5865 2013. 10. 18. 08:32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10.18 06:16

 

あざみの歌-伊藤久男///歌の背景(D)|★....演歌 게시판

黃圭源 | http://cafe.daum.net/enkamom/KTiH/4209 


あざみの歌-伊藤久男


あざみの歌-倍賞千惠子

あざみの歌-伊藤久男

作詞 横井弘 作曲 八洲秀章


山には山の愁いあり
海には海のかなしみや
ましてこころの花園に
咲きしあざみの花ならば


高嶺(たかね)の百合のそれよりも
秘めたる夢をひとすじに
くれない燃ゆるその姿
あざみに深きわが想い


いとしき花よ 汝(な)はあざみ
こころの花よ 汝はあざみ
さだめの径(みち)は果てなくも
香れよ せめてわが胸に
あああー


歌の背景

歌詞는, 1945年에 復員해 온 当時18歳의 横井弘(よこいひろし)가, 家族이 避難하고 있던 下諏訪・霧ヶ峰八島高原에서, アザミ(엉겅퀴)의 꽃에 自身의 理想의 女性像으로 回想하며 쓴 것이라고 합니다. 八島高原에는, 이 노래의 歌詞를 새긴 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八洲秀章(やしまひであき)가 作曲 한 노래가 NHK의 라디오 歌謠에 採擇되어 1949年 8月 8日부터 放送되었습니다. 音盤이 만러진 것은 1951年 8月이었습니다.

伊藤久男(いとうひさお)

1910年 福島県 出身
本名 四三男

父親은 県会의 巨物 政治家였습니다. 아주 裕福한 家庭에서, 当時에는 매우 드물었던 피아노에 沒頭해, 中學 무렵에는 피아니스트를 志望하게 됩니다. 家族 親族의 反對를 무릅쓰고 單身으로 上京하여, 音樂을 生業으로 하는 것에 反對하고 있던 家族에게 僞裝하기 爲해 東京 農業大學에 入學합니다. 그 後, 同鄕의 新進 作曲家 古関裕而(こせきゆうじ)와 親密한 關係가 되어 家族에게는 알리지 않고 農大를 退學하고, 帝國 音樂學校로 進學합니다. 同校에서는 同鄕의 声楽家 平間文寿(ひらまふみとし)에 師事를 받습니다.

農大를 退學한 것이 家族에게 알려지자 每月 보내주던 生活費가 끊키여 音樂學校의 同級生과 함께 콜롬비아에서 아르바이트를 始作합니다. 피아니스트 志望이었던 四三男으로서는 本意는 아니었지만, 이것이 後에 作曲家나 디렉터들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1932年 古関裕而의 勸誘로1933年6月에「伊藤久男」名義로 REGAL (코롬비아의 廉価盤)로부터「今宵の雨」로 데뷔합니다. 콜롬비아로부터의 데뷔는 同年 9月의「ニセコスキー小唄」로, 宮本一夫(みやもとかずお)의 이름으로 発売하여 出身地 本宮(もとみや)를 놀라게 뒤집은 芸名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아르바이트로 타이헤이에서 内海四郎(うちうみしろう)의 名義로 吹入하고 1935年 「別れ来て」의 發賣를 機會로 藝名을 伊藤久男로 改名합니다.

伊藤久男의 抒情性이 豊富한 바리톤은 正評이 있어, 그 歌唱法으로 昭和10年代前半부터 戦時歌謡의 吹入이 많았습니다, 伊藤久男로서의 첫 히트는 1938年 「湖上の尺八」로. 慰問 演奏로 藤原義江(ふじわらよしえ)에게 抒情的인 바리톤을 流行歌手로서 살리는데 도움을 받습니다. 한때는 오페라 歌手로서의 進路도 생각했지만, 1938年, 大陸戦線에 服部良一(はっとり りょういち), 赤坂小梅(あかさかこうめ)等과 慰問 公演때, 自身의 노래에 눈물을 흘리는 兵士의 모습을 보고 流行歌手의 길을 選択했습니다.

그 後, 「暁に祈る」「白蘭の歌」「高原の旅愁」「お島千太郎旅唄」를 連続으로 히트시켜 스타 歌手로서의 地位를 굳건히 確立했습니다. 1940年 日本劇場의 어트랙션(attraction)에 出演해, 伊藤가 노래하는 「熱砂の誓い」를 客席에서 본 岡本敦郎(おかもとあつお)는, 그 歌声에 感動해, 歌手가 될 決意를 했다고 述懷 하고 있습니다.

한便, 많은 映画에도 登用되어 1939年 松竹映画의「純情二重奏」에 떠돌이 藝術家로서 1940年 「暁に祈る」에 노래하는 軍人으로서 게다가 1942年에는 大映映画「歌う狸御殿」에는 마을의 靑年役으로 스크린에도 活躍했습니다.

終戰 直後에는, 戦時歌謡를 많이 노래한 責任感으로부터 避難 끝에 술에 빠져 再起 不能이라고도 말했지만, 1947年 松竹映画「地獄の顔」의 主題歌「夜更けの街」에 컴백되고. 그 다음은, 「シベリア・エレジー」「イヨマンテの夜」「あざみの歌」「山のけむり」「君いとしき人よ」「数寄屋橋エレジー」「ひめゆりの塔」 等 여러 가지 장르로 히트를 날렸습니다. 特히 라디오 歌謠에 대하여는 詩情이 豊富한 抒情의 노래가 많아, 「たそがれの夢」은 本人도 꽤 마음에 들고, 晩年까지도 愛唱 하고 있었습니다.

伊藤는 同鄕의 作曲家•古関裕而의 作品을 많이 불렀습니다.「露営の歌・続露営の歌」「暁に祈る」「海底万里」라는 戦時歌謡로부터 「イヨマンテの夜」「君いとしき人よ」といった歌謡曲라는 歌謠曲, 또, 現在에도 여름의 高校 野球 全國 大會에서 불려지고 있는「栄冠は君に輝く」까지도 伊藤의 Lyriques한 歌唱에 依해 声価가 높이 評價되었습니다.

性格은 確實하고 豪放磊落(호방뇌락). 술을 恪別히 좋아해, 누구로부터도「チャーさん」의 愛稱으로 尊敬을 받았습니다. 한便, 非正常인 潔癖症으로, 恒常 알코올 脫脂綿을 가지고 다녔으며, 閉所 恐怖症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잘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日本歌手協会의 設立에도 盡力해, 後進의 指導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지만, 晩年은 暴酒로 糖尿病 때문에 인슐린의 注射에 依存. 昭和50年 以後에는, 注射에 依한 低血糖 発作으로 떨리면서 stage에 서야 하는 괴로움도 겪었습니다.

1978年에 紫綬褒章을 受賞하고, 1982年에는 日本 레코드 大賞 特別賞을 받았습니다(이 受賞 때 中繼로 出席 出演이 伊藤가 國家機關에 모습을 보이는 生涯 最後가 되었습니다.). 다음해 1983年 4月, 肺水腫으로 死亡, 享年 72. 勲四等旭日小綬章受勲하였습니다.

作成者 黃圭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