歌の背景函

泣酒川(なさけがわ)-水沢明美///崔永年과 그 家族의 親日行脚

bsk5865 2013. 10. 29. 08:47

보낸사람 : 소담 엔카 운영자 13.10.29 06:19

 

泣酒川(なさけがわ)-水沢明美///崔永年과 그 家族의 親日行脚(D)|★....演歌 게시판

黃圭源  http://cafe.daum.net/enkamom/KTiH/4261 




泣酒川(なさけがわ)-水沢明美

作詞 水木れいじ 作曲 朝月廣臣


泣酒川…生きるこの世の 波風に
お酒を頼りの 浮き沈み
女ひとりの なみだの町で
夢を灯して 二十年…
やっと逢えたね 逢えました
あなたという名の いのち舟


この川で…うしろ姿を 見送れば
こころの中にも 雨がふる
泣いた数だけ 折鶴おって
袖を濡らした 夜いくつ…
やっと見えたね 見えました
ネオンの岸にも 春ひとつ


泣酒川… 水よ 心が あるならば
叶えてください この恋を
どこへ着こうと あなたの胸に
さだめ預けて 流れゆく…
きっと咲かすね 咲かせます
しあわせ一輪 おんな花


崔永年과 그 家族의 親日行脚

1910年 2月 6日字 大韓每日申報에 '父子가 똑같군'이란 題目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親日賣國 行爲를 했다는 記事가 揭載되었습니다.

"國民新報 社長 崔永年의 아들 영식이는 나이 지금 十余歲 된 아이인데, 보성小學校에서 工夫하더니 近來 그 아이가 제 父親의 敎訓을 順從함인지 그 姓名을 日人의 姓名으로 고쳐서 鷄林瑛太郞이라 하고, 그 學校에 같이 工夫하는 學徒 五,六 名을 誘引하야 다 日人의 姓名으로 고쳤으며 工夫는 아니하고 못된 짓만 하는 고로 그 學校에서 照査하야 黜學하였다더라."

이 記事는 一進會 機關紙 國民新報의 第4代 社長인 崔永年의 아들 최영식이 創氏 改名한 史實을 報道한 것입니다. 10余歲의 小學校 學生인 은 親舊들을 꾀어 그들의 이름도 日本式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鷄林瑛太郞이라는 日本式 이름은 아버지 崔永年이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崔永年은 1859年 京畿道 廣州 出生으로 어려서부터 詩文에 能하여 大院君에게 賞을 받기도 했습니다. 1901年 以後 皇城新聞과 大韓日報 主筆을 歷任했습니다. 一進會(앞줄이 武裝한 一進會원들, 뒷줄은 日本人) 總務로 活動하다가 1909年 以後 一進會 機關紙 國民新報의 社長을 지냈습니다. 그는 1909年 以後 '韓日合邦' 運動의 一線에서 活動했습니다. 常務組合部長으로 被選되어 補負商 組織을 一進會와 連結시켰으며, 國民贊成會•國民協成會•儒生建議所 等에서 올리는 '合邦' 請願書 等을 代身 써주었습니다. 그의 아들 최원식 亦是 아버지처럼 平壤의 최익환이 올리는 '合邦贊成書'를 代身 써 주었습니다. 新小說 '秋月色'을 쓴 親日 性向의 作家 崔瓚植도 그의 아들입니다. 崔永年과 그 아들들의 뻔뻔한 親日 賣國 行爲는 言論界에서 指彈의 對象이 되었습니다.

"마귀굴에 최영년은/ 합방하자 창도타가/ 무부무군(無父無君) 역적이란/ 토역서가 답지해도/ 흉흉심장 불변하고/ 거거익심 저흉계를/ 아들에게 전수하여/ 남의 자식 꾀음꾀음/ 일인노릇 시켜가며/ 마귀굴로 끌어너니/ 도적놈도 제자식은/ 착한일로 교훈컨만/ 도적보다 더흉악한/ 영년같은 저흉적은/ 천하만국 역사상에/ 전무후무 하리로다."(申報,1909.2.9.).


최영식이 主動하여 보성小學校의 一部 學生들이 이름을 日本式으로 바꾸자 校監 김익용은 최영식에게 黜敎 處分을 내렸습니다. 理由는 '自己 祖上의 氏族을 망녕되이 變하며 또 다른 아이들을 誘引하여 人倫이 끊어지고 學校 規則을 違反한 行爲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이튿날 崔永年의 아들 4兄弟가 아우의 黜敎 處分에 對해 抗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敎育界에서는 日本式으로 이름을 바꾼 최영식이 다른 學校에 入學을 請願하는 境遇 '一切 拒絶하자'는 輿論이 形成되기도 했습니다.

어린 子息에게까지 賣國 逆賊 行爲를 시켜 '魔鬼窟'로 끌어들인 親日派 崔永年은 一抹의 道德的 觀念도 없는 '天下萬國의 歷史에 前無後無한 凶賊'이라고 批判받았습니다. 그는 日帝 强占 後 大東斯文會•朝鮮文藝社•大同詩壇 等 親日文人團體에서 活動하다가 1935年 79歲로 死亡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